워터멜론 슈가에서 / 미국의 송어낚시 보통날

최근에 구매한 책 중 가장 후회하는 책이며 좋은평은 한 줄도 적지 않을 것이니 작가의 팬이라면 읽지 않길 바랍니다.

워터멜론 슈가에서
책소개

1967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전 세계 문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은 <미국의 송어낚시>에 이어, 그 다음 해인 1968년 출간된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또 다른 작품. '워터멜론 슈가로 둘러싸인 가공의 마을, 아이디아뜨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화적인 이야기이자 파스토랄(전원생활이나 목가적인 정서를 주제로 한 시문학)'이다.

마치 목가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사회 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이 마을에는 도처에 강이 있고, 그 강에는 송어들이 살고 있다. 강에서는 죽은 사람들과 함께 도깨비불이 넣어진 유리관이 있어 언제나 빛을 낸다. 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거대한 식물들의 조상이 있으며, 사람들이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오두막이 있다.

구성의 독창성과 동화적 은유, 시적 표현들로 1960년대 수많은 독자들을 열광시킨 소설이다. 미국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고 매혹된 최승자 시인이 번역했고, <미국의 송어낚시>를 우리말로 옮겼던 김성곤 교수가 작품 해설을 썼다.


얼마 전 알라딘에서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발견했다.
예전 비밀독서단에서 소개가 되기도 했던 책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구매했다.
그게 첫번 째 실수인데, 요새 책장에서 다시 안 볼 책들을 골라 판매하며 새 책이 천원에 팔리는 걸 보니 판매가 천원이 안되는 책은 소장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읽자마자 팔아버리고 싶어졌으나 700원의 판매가를 보니 정말 손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한 제목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는 정말 달콤한 제목이 다인 소설이다.
세상에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이기적인 소설은 처음이었다.
이 소설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 소설은 iDEATH라는 곳에(사실 이 아이디아뜨라는 곳이 장소를 명명하는 것인가 조차 명확하지 않다.) 사는 주인공(사람도 아닌 어떤 존재, 아니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관념? 말그대로 어떤 무엇)과 그 곳에 사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안읽은 사람은 저 부연설명이 이해가 안될 것이다.
물론 책을 읽은 나도 이해가 안된다.

아이디아뜨라는 명칭은 작가가 만든 i+DEATH의 합성어이며 번역가는 그것을 트릭이라는 생각으로 idea+death의 합성어로 생각해 아이디아뜨라 명명한다. 여기서부터 이 소설의 문제가 시작된다.
인보일의 자살소동을 이해하기 위해 번역가는 아이데뜨라 표기 했어야 한다고 본다.
애초에 i를 소문자로 친절하게 적지 않았는가.
영문판으로 읽은 독자라면 작가의 의도든 트릭이든 iDEATH라는 단어를 아이데뜨라고 읽었을것이다.
독자는 거기에서 오는 관념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이 불확실한 이름의 아이디아뜨는 등장인물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장소라 칭할 수 없는 범위의 장소 혹은 인물들의 관념적인 어떤 곳을 말하기도 한다.
이 아이디아뜨에 상반되는 장소의 이름은 '잊혀진 작품들'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어떤 것을 눈치챈다.
이 것들이 의미하는 무엇이 있겠구나.

그리고 이세계의 중심인 워터멜론 슈가. 이 역시 설명할 수 없다.
이 것은 이 세계를 만드는 모든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이 모든 것이 워터멜론 슈가 안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워터멜론 슈가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워터멜론 슈가는 일곱가지가 있는데 이 것은 일곱 가지의 태양으로 만들어진다.
책 표지에서 이 소설을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마을에서 펼쳐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라고 표현한다.

이 설명이 이 책의 배경이며 인보일과 마가렛이 자살하는 사건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아주 불친절한 힌트를 주며 무엇인가 상징하는 듯한 동화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결국 실체가 없다.
인보일이 아이디아뜨를 보여주겠다며 자살을 하고, 마가렛이 끝내 목을 메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이해하려 해보아도 그 뿐이다. 이야기에 실체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것이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냐고????

그나마 인보일이 독자에게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말해주지. 이곳에서 썩은 냄새가 나. 여긴 전혀 아이디아뜨가 아니야. 이건 당신의 상상이 꾸며낸 허구야. 여기 있는 너희들 모두가 이 병신 같은 아이디아뜨에서 병신 같은 짓들을 하고 있는 한 무더기의 병신들이란 말이야."
이 대사를 보고 난 이 소설에 실체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알 것같고, 이해할 것 같은 것이다. 그런 기대를 자꾸 품게 한다.
인보일이 아이디아뜨를 보여준다며 자신의 엄지손가락과 코와 귀를 자르고, 아이디아뜨의 진정한 주인은 살육을 저지르는 호랑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iDEATH에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그래서 뭐??????
호랑이가 뭘 의미하길래 주인공이 그 과거에 집착하는데?
거실에서 부엌 사이 통로가 어떻게 강 하구로 이어지는 건데?
나를 비워야 비치는 거울이 보여주는 게 뭘 의미하는건데?

더욱이 작가가 독자에게 주인공을 설명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당신이 오래전에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저면 아주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아니면 어떤 이들이 당신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했다. 당신은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이 한 것이 틀렸다고 말했다. '잘못해서 미안합니다.' 하고서, 당신은 다시 다른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p.17)

주인공이 사람이긴 한걸까.
등장인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긴 할까?

마가렛이 자살하고 폴린이 등불을 든 처녀라는 것이 밝혀지고 악기를 연주하길 기다리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이 나면서 난 끝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소설속 인물에 대화가 어이없다.

  "넌 어째서 그녀가 자살했다고 생각해?"
 프레드가 말했다.
 "왜 그녀가 그런 짓을 해야 하지? 그녀는 너무도 젊은데. 너무도 젊어."
 "모르겠어." 내가 말했다.
 "그녀가 어째서 자살을 했는지 난 모르겠어."
(p.201)

나도 정말 모르겠다.
난 결국 이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허황되고 허세 가득한 표현력과 스토리를 아름답고 슬프다고 포장하는 것에 넘어가지 말자고.
하나도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냥 잔혹동화라고 했으면 재미야 있었겠지.
이 소설은 실체도 없고 알맹이도 없다.
이런 걸 역작이라고 하는 미국 문학이 불쌍할 정도다.

그런데 '미국의 송어낚시'가 그렇게 칭송받는 소설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워터멜론 슈가에서도 나오는 송어부화장을 따라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어보기로 했다.
그럼 이 책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내 두번째 실수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나마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본게 다행이다.
최근 에세이나 교양서적을 읽으면서 여러권의 책을 동시에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도 완독은 한다. 특히 소설은 아무리 재미가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런데 결국 반을 읽고 포기했다.
처음 몇장이 정말 고비였다. 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반만 읽자. 그럼 뭐가 보이겠지 싶어 꾸역꾸역 절반까지 읽고 이건 시간낭비임을 확신했다.

이건 더욱 알맹이가 없다.
이 책은 소설이라고 해선 안된다.
스토리가 없고 스토리텔링은 처참하다.
이런 건 소설이 아니다.

일단 '미국의 송어낚시'는 이해는 된다.
책에 내용이 온통 풍자로만 가득해서 뒤에 설명서가 따로 있으니까.
단, 설명서 없이는 책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도 내용이 처참할 뿐이다.
의미없는 책 제목의 나열, 날짜의 나열. 요리방법과 나름 그 속의 작은 이야기가 몇번 나오긴 한다. 재미는 없지만.
작가의 의도를 알아보려 책을 검색하기도 하고 이런 방식을 취향차이라고 생각해보려고도 했으나 이건 정말 답이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 좋다.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이란게 이렇게 멍청한 거였나.
개성과 자율성, 다양성이라는 말로 이렇게 수준낮은 글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예술은 처참한 수준으로 떨어진 거다. 
간결하다 포장했지만 간결함이야 말로 꽉찬 것이다. 
이 책의 글은 간결하나 내용이 없다.
어휘력은 물론 스토리텔링도 뒤떨어진다.
그게 컨셉이라면 얼마나 허세 가득한 컨셉인가.
단지 치기 어린 시절의 작가의 불평불만이 가득한 글일 뿐이다.
비판도 아니고 풍자라 표현하기도 아까울 비꼬기만 가득한 글일 뿐이다.
스토리가 없다.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이건 소설이 아니다.
단지 그 시절 반체제 정신과 반문화 정신이 가득한 그 반항적인 시절의 젊은 사람들에게나 통했을 책이다.
왜 그 시대 20대들의 성서라고 했는지 책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시대의 치기 어린 세대들에게 통하는 책이라는 뜻이었다는 걸.

작가는 이 소설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에서 특히 그렇지만, 소설에서도 과도한 설명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제 작품 속에 지혜보다는 '위트'를, 본질의 구명보다는 '과정'을 더 중요시합니다. "미국의 송어낚시"도 끝없이 계속되는 과정일 뿐 본질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 소설에서는 도덕성이나 교훈적인 요소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도덕성이나 교훈이 결코 문학과 예술의 명제는 아니니까요.

나는 위트보다 지혜가, 과정보다 본질이 중요하다.
작가이면서 우선순위가 나쁘다.
본질도 없는 소설로 독자에게 뭘 얼마나 보여주겠다는 걸까.
작가의 의도 자체가 허황되서 놀랐다. 그걸 포장도 잘 못하는데에 더 놀랐고.
반문화 소설을 쓰면서 도덕성과 교훈적인 요소를 문학과 예술에 결부시켜 변명하는 것도 우습다.

이 소설은 그냥 그 시대 미국의 시대정신 그 자체이며 그게 다이다.
예술로서 문학으로서 기대는 전혀 안하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소설은 어느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진짜 인간적으로 워터멜론 슈가에서 이해한 사람만 추천하자.

노트르담 드 파리 보통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원작 소설을 드디어 완독했다.
신원출판사의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었지만 원작의 제목으로 표기한다.


줄거리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광장 주변에서 살아가는 집시들 중에 에스메랄다라는 아름다운 외모의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염소를 데리고 다니면서 춤과 노래로 공연을 하면서 돈을 벌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거리의 시인 그랭구아르는 그녀를 보고 반해 쫓아가지만 집시들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때 에스메랄다가 그랭구아르를 구해주는데, 한편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파리 노트르담성당의 부주교 클로드 프롤로는 양아들인 꼽추 콰지모도에게 에스메랄드를 납치할 것을 지시한다. 콰지모도는 태어날때 부터 꼽추로 버려진 아이였으며 프롤로 주교가 데려다 키웠는데 노트르담성당의 종을 치는 종치기였으며 추악하게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랭구아르는 콰지모도의 힘에 밀려 쓰러지고 경비대장 페뷔스 드 샤토레르가 나타나 콰지모도를 물리치고 에스메랄드를 구해준다. 체포된 콰지모도는 수레감옥에 실려 잡혀가는데 오히려 에스메랄다는 콰지모도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콰지모도는 그런 에스메랄다를 통해 태어나 처음으로 받는 호의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구해준 경비대장 페뷔스 드 샤토페르를 사랑하자, 프롤로 부주교는 이것을 질투해 그녀가 보는 데서 샤토페르를 칼로 찌르고 에스메랄다에게 살인죄라는 누명을 씌운다. 살인죄로 체포된 에스메랄다는 고문에 못 이겨 유죄를 인정하고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에스메랄다가 교수대 앞으로 끌려와 형을 집행당하기 직전, 콰지모도가 종탑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서 그녀를 구출하고 불가침의 영역인 성당 안으로 도망친다.

프롤로 부주교는 그랭구아르에게 에스메랄다를 성당에서 끌어내 사형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슬쩍 흘린다. 에스메랄다는 그랭구아르가 예전에 집시 소굴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그와 결혼하겠다고 나서서 구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랭구아르는 집시의 우두머리인 클로팽과 함께 집시 패거리를 이끌고 성당을 습격하여 에스메랄다를 구출하려 하는데, 콰지모도는 이들이 에스메랄다를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하여 거세게 저항한다. 이때 국왕은 집시들이 노트르담성당을 약탈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진압군을 파견하고, 소동의 원인인 에스메랄다를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혼란의 와중에 에스메랄다를 거짓으로 속여 성당 밖으로 나오게 한 프롤로는 교수대 앞으로 그녀를 끌고가 자신과 페뷔스 드 샤토페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프롤로는 에스메랄다로부터 끝내 사랑을 거절당하자 그녀를 교수형에 처하게 한다. 에스메랄다가 교수형을 당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프롤로를 발견한 콰지모도는 프롤로를 탑 아래로 떨어뜨려 죽게 한 뒤 사라진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교수형을 당한 시신들을 묻은 묘지에서 에스메랄다의 해골을 꼭 껴안고 있는 콰지모도의 유골이 발견된다.

15세기 노트르담성당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풍광과 거지에서 왕까지 온갖 계급의 인간군상을 통하여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과 부당한 형벌제도, 하층민의 소외된 삶 등을 묘사한 이 소설은 《레미제라블》과 더불어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인 동시에 프랑스 낭만주의문학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여러 차례 영화화되고, 연극 및 뮤지컬로 무대에 올려졌으며, 한국에서는 원제 외에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Dame de Paris] (두산백과)



완독까지 정말 긴 시간이었다.
페이지 수가 많은데다가 사족이 방대하게 서술되어 지루함에 몇번이나 중단했는지.
그러나 워낙 매력적인 스토리에 결국 완독을 해내고 말았다.
차마 중간에 잡을 수 없었던 다른 책들도 이제 읽어야지.


에스메랄다가 납치를 당하고 콰지모도가 효수대 위 수레에 묶이기까지가 책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이 내용이 큰 줄거리의 초반 부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족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알 수 있다.
소설의 중반쯤 되야 메인스토리가 진행된다.
한 사건을 다각도에서 인물에 따라 시선을 옮기며 진행되는데, 한 인물의 시선으로 사건을 먼저 보여준 뒤 그 사건 속에 있는 다른 인물을 따라가 그 시선에서 사건을 풀이하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는 주요인물에 특정되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등장인물이 매우 많이 나오고 모든 인물의 배경설명이 굉장히 상세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정말이지 법관의 내력과 수입원, 심지어 어디 수도원 묘석에 군복 차림이 새겨져 있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고.
단, 시대적인 특질과 사건이 일어나는 노트르담 배경에 대한 묘사는 볼만하다.
사법관과 왕실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지며 차별에 대한 사회 전모의 묘사가 부담스럽지만 풍만한 배경을 보여준다.


작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아주 마음껏 이용한다.
게다가 개인적인 생각이 소설에 상당히 반영되어 있고 독자에게 말을 건내기도 한다.
그리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
번역의 문제보다는 그냥 작가가 할말이 너무 많아서 한 문장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소설에서 이 중요한 가독성을 이런 저런 이유로 떨어뜨려도 스토리텔링이 너무 좋아 모든 것을 감안하게 된다.
이래서 위대한 소설가인가 보다.
(작품해설 부분이 가독성이 제일 좋다.)


콰지모도는 엄청난 괴물로 묘사가 된다.
힘이 무척 세며 심술궂은 성격으로 외적인 면도 굉장히 불행하게 보이지만 내적인 면 또한 외모때문에 사고방식이 비뚤어져 있다.
특히 생김새의 묘사가 너무 혹독하다.

  게다가 이 사나이는 몸 전체가 찌푸린 모습으로 보였다. 커다란 머리에는 붉은 머리칼이 곤두서 있었고, 두 어깨 사이에는 툭 튀어나온 커다란 혹이 달려 있었다-앞쪽에도 이 혹과 똑같은 것이 한 개 튀어나와 있었다. 기묘한 상태로 구부러져 무릎이 있는 곳에서만 양쪽이 맞닿는 한 쌍의 넓적다리와 두 정강이, 커다란 발, 괴물 같은 손, 그리고 이러한 괴물 같은 몸매에 덧붙여 뭔가 무섭고 씩씩하며 재빠르고 용감한 행동거지. (p.75)


세상에 버림받은 그는 모든 인간을 증오하지만 오직 한사람 프롤로만은 존경하며 사랑한다.
책 속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개와 사육주라 표현한다.
프롤로는 버려진 아이인 콰지모도를 주워 와 세례를 베풀고 콰지모도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은인이다.
노트르담의 종지기로 살며 청각을 잃게 되어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 방법마저 끊기는 그에게 프롤로가 유일한 소통 그 자체가 되어준다.
이러한 관계는 콰지모도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했던 에스메랄다를 만나고 나서도 사실상 변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가 죽지 않았다면 콰지모도는 죽을 때까지 프롤로를 더 사랑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겁탈하려한 프롤로에게 분노조차 없이 헌신하는 모습이 그 사랑의 깊이를 보여준다.
 

작가가 낭만주의의 대표작가인만큼 감정표현과 흐름이 대단하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든지 프롤로가 에스메랄다에게 애원하는 장면 등에서 이토록 애절한 소설임에 놀라웠다.
프롤로에게 복종하는 콰지모도의 마음마저 절절하니 정말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페뷔스가 에스메랄다를 유혹하는 대사는 너무나 달콤해서 에스메랄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사랑하고 있고말고. 너는 내 생애 단 하나밖에 없는 천사야!"라고 페뷔스는 반쯤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 몸도, 내 피도, 그리고 내 영혼도 모두 너의 것이야. 모두 너를 위해 있는거야. 사랑하고 있고말고. 너 이외에 아무도 사랑한 적은 없었다." (p.407)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인 에스메랄다는 정말 아름다운 집시여인이다.
그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프롤로에게 고통을 당하고 콰지모도에게 보살핌을 받게 되지만 낮은 신분 때문에 페뷔스에게 쉽게 놀아나기도 한다.
또한 집시라는 신분으로 그랭구아르와 결혼을 하지만 페뷔스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
이런 대조되는 설정이 에스메랄다를 더 매력적이고 안타깝게 만든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야말로 에스메랄다를 대표하는 성질이지만 숨어있는 상황에서조차 페뷔스를 외치고 마는 장면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최소한 페뷔스가 에스메랄다에게 진심으로 흔들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가벼운 감정이었다는 것도 너무 안쓰럽다.

  '천국에 있는 여인처럼 아름다운 여자다. 그러나 실은 보잘 것없는 거리의 무희에 지나지 않는다. 달처럼 아름답고 자라처럼 천한 태생이다.……' (p.154)


프롤로의 명령으로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다 잡힌 콰지모도는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하고 효수대에서 올려진다.
그제서야 본인의 처지를 깨닫지만 어쩔 도리 없이 처벌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그 위에서 오직 '물을 다오'라고 외친다.
비탄의 외침에도 지켜보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는데, 오직 에스메랄다만이 다가와 물 한모금을 나누어 준다.
그 자애로운 모습에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콰지모도가 처음으로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장면이고 그의 마음에 비극이 시작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콰지모도에게 물을 달라는 외침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달라는 애원이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한 모금의 동정도 받지 못하는데, 에스메랄다에게는 물이라는 자비와 인정을 받게 된다.
이 때 에스메랄다는 콰지모도에게 마치 성모와도 같다.
콰지모도가 처벌을 당하는 모습이 너무 잔인하게 묘사되어 에스메랄다가 더욱 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에서 이 장면이 아이들이 보기에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는데, 원작의 잔인함을 보고 나름 순화된 것임을 알았다.
소설 속에서는 핏방울이 군중들에게 뿌려졌다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콰지모도와 프롤로의 사랑은 첨예하게 다르다.
콰지모도는 자신의 외모가 혐오스러움을 알기 때문에 에스메랄다를 향한 사랑을 속으로만 삭힌다.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지만 가질 수 없음을 아파하는 것으로 사랑을 보여준다.
콰지모도의 사랑은 그의 체념과 에스메랄다의 연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가슴을 가진 콰지모도지만 에스메랄다 앞에서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사랑의 순수함이 빛을 발한다.
괴물 같은 외모로 버려진 남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이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에스메랄다가 교수대로 끌려가기 직전 그녀를 구하고 '성역이다'를 외쳤던 용맹한 그가 자신을 보고 무서워하는 그녀를 위해 벽 속에 숨어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고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프롤로를 사랑함과 같이 콰지모도에게 사랑은 희생이다.

  "봐, 저기 아주 높은 탑이 있지? 저기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땅바닥에 닿기 전에 죽어버릴 거야. 당신이 내가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한마디 말도 필요치 않아. 살짝 눈짓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단 말이야." (p.538)


프롤로의 사랑은 소유이다.
처음 그는 에스메랄다를 행복하고 순결한 자신을 유혹하러 온 악마라 생각하지만 숙명임을 인정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감옥 속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종교재판소에 고소하기에 이르는데, 결국 소유할 수 없는 그녀를 교수대로 데려간다.
프롤로는 신부로서 느끼는 숱한 고뇌로 인해 줄곧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무서운 얼굴로 항상 그녀를 눈으로 쫓는가 하면 교수형에 처하는 날 미쳐 날뛰며 마을 어귀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신부인 그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 페뷔스를 살해하려는 행동까지 하게 된다.
성직자로서 느끼는 죄악감보다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 점점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학문을 사랑해서 모든 학문에 통달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것처럼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방법도 같았다.
지식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지만 아무리 구걸해도 끝내 가질 수 없자 분노와 질투로 그녀를 죽게 한다.
냉정하고 엄격했던 프롤로는 처음 느낀 사랑의 충격으로 스스로를 제어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직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것이 프롤로의 숙명이었고, 그의 성질 그 자체였으므로.

  "아! 만약 네가 싫다고 하면 구태여 발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발밑의 땅바닥에라도 입을 맞추겠다. 아! 어린애처럼 울기라도 하겠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라면 심장이나 창자까지라도 이 가슴에서 도려내 보이겠다." (p.689)


프롤로의 사랑은 맹목적이어서 그는 에스메랄다 이외의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그런 프롤로와 유쾌한 캐릭터인 그랭구아르의 대화가 정말 재미있다.
기적 궁전에서 교수형 당할 뻔한 그랭구아르를 에스메랄다가 결혼함으로써 살려준 적이 있는데, 프롤로는 그 은혜를 갚으라며 독촉한다.
성당에 갇힌 에스메랄다의 교수형을 막기 위해 그랭구아르에게 옷을 바꿔입고 남아 그녀를 살리고 그는 교수형을 받으라 말한다.
그 뻔뻔함에 어이없지만 은사의 말이라 억울하게 듣고 있는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비난하며 요구하는 대사가 너무하고 웃기다.

  "그 아름답고 다정하며 귀엽고 이 세상의 빛에는 없어서 안 되는 신보다도 더 거룩한 그 여인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에 비해 너는 아무것도 아닌 어중간한 지식을 휘두르는 반미치광이라고 할까, 아무런 쓸모도 없는 초벌그림이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풀이나 나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주제에 자기 딴에는 걷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한 네가 대낮의 각등처럼 쓸모없는, 남으로부터 빼앗은 생명을 가지고 계속 더 오래 살아가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냐?"(p.579)


소설이 다른 각색된 작품들과 가장 다른 점은 에스메랄다의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딸을 집시들에게 빼앗긴 후 작은 방에서 고행의 삶을 사는 은자가 되어 집시를 혐오하는 삶을 산다.
에스메랄다를 보고 그녀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증오하고, 마지막에는 교수대에서 도망가는 그녀를 잡아두기까지 한다.
하지만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되고 결국 교수형에 처하는 그녀의 곁에서 죽는다.
어머니의 삶 전체가 비참했지만 교수형에 처해지는 딸을 안고 있는 장면은 그 것마저 초월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마치 한 순간에 머리가 세는 것을 보는 듯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이다. 
어머니는 죽은 자라고 간주되는 은둔자에서 딸을 찾아 생명을 얻게 되고, 그 딸을 다시 잃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은둔자를 비유로 설명하는 방법을 보면 그 대단한 필력이 느껴진다.

  ……이미 딴 세계의 태양에 비춰져 있는 눈, 무덤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귀, 그 같은 몸에 갇힌 그 같은 영혼, 그 같은 감방 속에 갇힌 그 같은 몸뚱어리, 육체와 돌이란 이중의 표피 밑에서 고통을 받는 은둔자들의 영혼의 신음 소리,…… (p.257)


뮤지컬 넘버에서 의아했던 점도 소설을 통해 해소가 되어 좋았다.
'벨' 넘버 중 "그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가. 이땅에 살아갈 가치도 없는자."라는 가사가 맥락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바로 은자의 이야기였다.
수레에 묶인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가 주는 물을 마신 후 '벨' 넘버가 시작되는데, 소설에서는 이 장면을 본 은자가 에스메랄다를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는다.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사랑을 받는 에스메랄다를 증오하는 한사람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그랭구아르와 프롤로의 관계 또한 사제관계임을 알게 되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의 가사가 실제 소설의 결론으로 씌여 있다는 것이다.
항상 눈물나게 했던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찾겠지. 끌어안은 채 썩어간 두 사람의 뼈를"이라는 가사처럼 실제로 두 사람의 뼈를 발견하고 소설이 끝나서 너무 놀라웠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향한 사랑이 너무 깊어 결국 죽은 에스메랄다를 꼭 껴안고 함께 죽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스토리가 너무나 비극적이었는데 그 마지막은 정말 슬픔 그 자체였다.

소설의 긴 내용만큼 쓰고 싶은 말이 참 많다.
사랑하는 '노트르담 드 파리'를 완독해서 참 기쁜데, 같이 구매한 '웃는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다..

7년의 밤 보통날

하아 읽은지 너무 오래 되서 쓰기가 너무 부담스럽다..

책소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 작가 정유정의 장편소설. 수상 이후 오랜 시간 준비하여 야심 차게 내놓는 소설로, 치밀한 사전 조사와 압도적인 상상력으로 무장한 작품이다. 7년의 밤 동안 아버지와 아들에게 일어난 슬프고 신비로우며 통렬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령호의 재앙이라 불리는 사건에서 살아남은 열두 살 서원, 세상은 그에게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올가미를 덧씌운다. 친척집을 전전하던 끝에 결국 모두에게 버려진 서원은 세령마을에서 한집에서 지냈던 승환을 다시 만나 함께 살기 시작한다.

소설가이자 아버지의 부하직원이었던 승환에게 의지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서원에게 아버지의 사형집행 확정 소식이 칼처럼 날아들고 서원에게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낙인을 찍은 잡지 '선데이매거진'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내몬다. 서원은 세간의 눈을 피해 승환과 떠돌이 생활을 하며 승환에게 잠수를 배우며 살아간다.

세령호의 재앙으로부터 7년 후, 등대마을에서 조용히 지내던 승환과 서원은 야간 스쿠버다이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청년들을 구조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다시 받게 된 서원은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상자를 배달받는다.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소설은 승환이 쓴 것으로 7년 전의 세령호의 재앙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데…

[알라딘 제공]


일단 이 소설을 원작으로한 동명의 영화는 정말 별로다.
영화와 별개로 소설 '7년의 밤'에 관심이 있어 책을 읽는 거라면 굳이 영화는 볼 필요가 없다.


  오영제는 살해당한 아이의 아빠였다. 충돌지점을 향해 폭주하는 자동차였다. 팀장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고 침몰하는 난파선이었다. 두 극점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일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짐작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p.369)


소설은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라는 강렬한 문구의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정유정 작가만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잘 이용하는 작가가 있을까 싶다.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예고편과 후기를 너무 완벽하게 뽑아서 이야기의 시작과 맺음이 참 확실하다.


이야기는 서원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살인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겪어야하는 불행한 상황이 묘사되는데 승환을 마지막 동아줄로 생각하고 통화하는 서원이의 감정묘사가 너무 좋았다.

  신호가 떨어졌다. 잠시 후, 느릿하면서도 발성이 분명한 음성이 "여보세요" 했다. 아저씨였다.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데. 목이 꽉 막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목젖안에 무덤이 생겨난 기분이었다. 아저씨는 전화를 끊지 않고 끈질기게 물었다.  (p.22)


세령이의 아빠인 영제는 가족에게 집착하고 굴복시키려하는 굉장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으로 나온다.
아내인 하영과 세령의 위에 군림하려하며 학대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너무 무서웠다.
보통의 공포소설이나 스릴러와 다르게 가해자의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라 차마 못읽을 정도로 공포에 현실감이 있었다.
내용이 궁금하긴 한데 너무 무서워서 오영제를 장동건 혹은 너무 무섭지 않게 생긴 악역 배우얼굴로 상상하며 읽었다.


오영제가 딸을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너무나 무서운 오영제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한 마을을 통체로 없앤 살인마라고 하기엔 현수가 너무 소심한 모습이 아닌가.
결국 오영제가 복수를 위해 현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고 현수는 세령이를 죽인 죗값을 치르려 묵묵히 받아들이는 거라고 스스로 납득하며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이 진행될수록 최현수가 더 무서워졌다.
스트레스로 인해 나타나는 왼팔마비 증상, 그로 인해 야구선수를 그만둬야했던 과거,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 등 말도 못하게 우울하고 정신질환으로 점철된 사람이었다.
정말 이 사람이 그랬구나 생각이 들었다.
현수는 세령이를 죽인 스트레스로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죽은 아버지의 꿈을 꾸며 세령이의 시체를 버린 세령호로 밤마다 헤매고 다닌다.
거기에 전직 야구선수답게 큰 덩치와 평소의 소심한 성격까지 더해지면 캐릭터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내용이 내용인만큼 폭력적인 장면이 많은데, 현수는 외향적인 묘사도 폭력적이라 정말 진저리가 날 정도이다.

  살을 쏘는 듯한 시선이 관자놀이에 느껴졌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신발장거울 안에 그 남자가 있었다. 곤두선 머리칼, 미간에서 펄떡거리는 굵은 핏발, 번들거리는 진홍빛 눈자위, 분노로 떨리는 창백한 입술과 팽팽하게 경직된 어깨. 최상사였다. 동시에 현수 자신이었다.  (p.330)


세령의 죽음 이후 스트레스가 심해진 현수에게 왼팔마비 증상이 다시 생기게 된다.
늘어진 왼팔에 피를 내면 힘이 돌아오기 때문에 마비가 됐을 때 상처를 낸다.
언제나 그렇 듯 정유정 작가의 이런 묘사는 시각적인 효과가 굉장하다.

  그는 칼날을 손목으로 가져갔다. 푸릇하고 굵은 정맥이 지나는 곳이었다. 힘 조절이 중요했다. 동맥이나 인대에 닿지 않도록 얕고, 좁고, 빠르게. 칼날이 손목 위를 미끄러지며 살갗이 벌어졌다. 물대포를 발사하는 것처럼, 혈관이 울컥, 울컥, 핏물을 뿜어냈다. 손끝을 타고 시원스레 쏟아져 내렸다.  (p.268)



워낙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이 많은 소설이지만 가장 소름끼치는 장면은 영제가 현수를 미행하는 장면이었다.
꿈속에서 헤매이며 몽유병 증세를 앓고 있는 현수를 미행하던 영제가 병세를 깨닫고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힌트를 얻는 장면.
스스로 파멸해가고 있는 현수에게 가속도를 달아줄 덫을 어떻게 설치할 지 알아내는 장면.
정말 사냥꾼 같다.


소설은 처음부터 비극이었지만 최후의 세령호 사건을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은주였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건을 지켜보던 승환도 현수가 가장 사랑했던 서원이도 아닌 가장 현수를 뒤흔들 힘이 있었던 아내가.
비록 싸움으로 부부사이가 틀어져있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변화를 느끼고 미심쩍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과 자신의 계획을 지켜내야만하는 남편이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인물이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려워 모른척 했던 대가로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승환은 이 이야기의 관찰자이자 해설자이다.
오영제가 저지르는 일들을 추적해가는 동시에 현수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서원을 구하고 현수를 도와주며 승환은 현수의 편에 서있는 듯 보이지만 사건에는 크게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로써 인물들의 서사가 방해없이 자유롭게 진행된다.
결말에서는 이야기의 끝을 내는 역할을 하면서 단순히 관찰자가 아닌 이야기 속 등장인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중심 인물의 바로 곁에서 사건의 마지막까지 방관자의 위치로 있던 이유는 소설의 결말이 알고 싶어서였음을 서원에게 고백한다.
해설자의 역할에서 마지막에 인물들의 서사로 한 순간에 들어와 버리는 점이 재미있다.


소설의 제목이 7년의 밤인 이유를 현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령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서원을 살해하려한 그 날 부터 오영제에게 7년 전 밤이 계속 되고 있는 거라고.
서원이와 현수를 동시에 손에 넣을 생각이라고.
참 끔찍한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동시에 오영제에게 7년의 밤이 참 끔찍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년의 증오라고 할 수 있을까.


오영제는 마지막까지 끔찍한 인간이다.
그는 도망간 아내를 찾아가 죽은 딸의 입관 사진을 보여준다.
아내를 괴롭히기 위해 죽은 딸의 사진을 찍어오는 모습은 아들을 위해 마을 전체를 침수시킨 현수와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 상상도 못해본 악질적인 캐릭터이다.


마을 사람들을 수장시키고 만 현수는 스스로를 단죄하기 위해 자살도, 종교도 거부하고 사형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짓을 저지를 거라 말한다.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지 글로나마 상상해본다.

  현수는 눈자위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목의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피가 심장을 뚫고 솟구쳤다. 호수 한가운데에 갇힌 아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그의 숨통을 갈랐다. 아들이 겪고 있을 공포의 시퍼런 이빨이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p.424)


에필로그에서 서원은 아버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최현수라는 인간의 비극으로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최현수라는 저 거한의 세상은 어째 이리도 좁은 것일까. 영혼은 수수밭 우물에, 삶은 철창에, 주검은 마티즈 운전석만큼 옹색한 관에 갇혀 있었다.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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