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보통날

책소개

서가명강 시리즈 18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되어줄 쇼펜하우어의 소중한 통찰을 담고 있다. 국내 최고의 실존철학 권위자인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찬국 교수는, “사는 게 고통이다”라는 인생의 본질을 관통하는 쇼펜하우어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비유로 풀어낸다.

단 한 번이라도 사는 게 고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인생의 의미를 잃고 헤매고 있다면 쇼펜하우어의 말에 귀 기울여볼 것을 권한다. 촌철살인 염세주의 철학자로도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과 세계의 어두운 면을 철저하게 폭로하는 동시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고통의 본질을 마주하게 한다. 이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내 인생과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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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삶은 추악한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에 내 인생을 바치기로 했다.


대표적인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가장 좋아하는 철학가이기도 하고, 그 뛰어난 통찰력으로 촌철살인 하는 문장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다.
내가 염세주의자인가? 싶다가도 실로 어둡고 매서운 비판에 뒷걸음질 치기도 하면서.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철학이 남긴 영향은 지대했다.
니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철학자들, 프로이트,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들, 음악계에서는 바그너와 구스타프 말러가, 문학계에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에밀 졸라, 모파상, 앙드레 지드, 버나드 쇼, 서머싯 몸, 헤세, 카프카, 보르헤스, 릴케, T.S. 엘리엇 등 온갖 위대한 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염세주의 예술가들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는 것에 웃음이 다 나왔다. 거의 염세주의 자석이다. 말러가 이 리스트에 있는 게 너무 타당하잖아! 모파상과 앙드레 지드, 헤세는 뻔한 게 열받는다.
좋아하는 작가들 이름을 보며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었다니 새삼 놀라웠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 좋아하게 될 작가들이겠지.
이 정도면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이성이 아닌 욕망의 존재로 보았다.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가 끊임없이 결핍감에 시달리는 맹목적인 욕망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개체도 맹목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이성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원되는 욕망의 노예에 불과하다.
쇼펜하우어는 이해관계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툴 때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상대방의 이성이 아니라 이익이나 욕망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이 욕망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삶에 만족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될 것 같은 기대를 할 때나 실현되는 순간뿐이다. 그러나 욕망이 충족되자마자 만족감과 즐거움은 소멸하기 시작하여 우리는 권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물질이 풍족하면 권태에 시달리고, 그렇지 않으면 결핍감에 시달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가는 시계추다.'

쇼펜하우어는 인도철학과 불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요새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좋았나 싶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세계는 실재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을 통해서 표상된 세계,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 기관과 인식 형식을 통해서 여과되어 나타나는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를 '현상계'라고 부르며 이면에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실재 자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실재 자체를 칸트의 용어를 빌려 '물物 자체'라고도 부른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우주적 의지'라고 규정한다.
이는 불교의 '유식사상'과 유사하다.
현상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쇼펜하우어는 개체들의 근원인 우주적 의지도 맹목적인 욕망이란 성격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세계의 근원인 우주적 의지마저도 내적인 갈등과 고통에 시달리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는 결과로 귀착된다.
그는 무無가 존재보다 더 낫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으며,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66 세상에는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반면에, 비참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생이란 결국 평생을 지고 다녀야 할 무거운 짐이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보존 욕망인 식욕, 종족보존 욕망인 성욕,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미를 추구하는 욕망 세 가지로 보았다. 이 세 가지를 포함해 모든 욕망을 '살려는 의지'라고 부른다.
그가 이 욕망을 언급하는 방법이 매우 신랄한데 말 그대로 팩트'폭행'이다.
쇼펜하우어는 종족보존 욕망을 가장 강력한 욕망이라고 본다. 성욕을 충족시킬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종족보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종족의 보존과 유지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개체는 자식이 예뻐서 자식을 위해 온갖 노고를 다 하면서도 행복을 맛보지만 결국은 종족에게만 이로운 일을 자신의 행복으로 착각하는 셈이다.
종족의 의지에서 해방된 개인은 상대방의 혐오스러운 단점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그 모든 것이 성욕의 장난이었고 자신이 종족의 의지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종족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극심한 염세주의자의 선 없는 비판은 좀 무섭고 악의까지 느껴진다. 어우 모파상보다 맵다.
그야말로 이기적 유전자의 불버전이다.
특히 성욕과 생식기를 언급할 때 정말 매서운데 바로 프로이트가 생각났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다면 프로이트가 쓴 글인 줄 알았을 거다.
프로이트가 생식기와 성욕에 돌아버린 것에 쇼펜하우어가 얼마나 일조한 것인지.


92 생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자신에게 부과된 강제노동을 치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부채를 계약한 것은 성적인 쾌락을 얻는 것을 대가로 하여 그를 낳은 사람이다. 이처럼 한 사람이 즐긴 대가로 다른 한 사람은 삶을 살아야 하고 괴로워해야 하며 죽어야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외로움에 떨면서도, 함께 있으면 서로를 찌르는 고슴도치 같은 구제 불능의 존재다.' 그가 염인주의자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악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악의에 찬 인간은 사실은 극심한 고통과 불안을 겪고 있는 자다. 타인에게 잔인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완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성격은 물 자체로서 우주적 의지에 의해 각 개체에 주어지는 의지의 결정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같은 성격 아래 사유하고 행동한다.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서 세계를 달리 보고 경험하지만, 또한 정신의 수준에 따라 세계를 달리 보고 경험하기도 한다.
세계는 결국 사람들의 정신에 나타난 세계다. 따라서 정신의 수준에 따라서 세계는 달리 보이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의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게 통찰을 하는 것인지 비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245 이른바 인간이라는 무리가 자기도취에 빠져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자신들의 개성이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라거나 영원히 존속하리라고 믿는 것을 보고 있으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성이 욕망을 위해서 일하던 상태에서 벗어나서 사물과 세계를 호젓하게 관조하면 사물과 세계는 아름답게 나타난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심미적 관조'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는 심미적 관조 상태에서 경험하는 안식과 평안이야말로 바로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최고선이라고 한 신적인 행복의 상태라고 말한다.
예술은 순수 관조에 의해 직관된 영원한 이데아, 즉 사물들의 본질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을 표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예술 중에서 비극을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본다. 비극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아 절망에 빠져 모든 욕망과 쾌락의 허망함을 깨닫고 그것들을 포기하는 고귀한 인간들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욕망을 부정하게 하는 동인을 제공한다.
음악은 특정한 원인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감정의 본질과 정수를 표현한다. 다른 예술들이 사물의 이데아를 표현하는 데 반해 음악은 우주적 의지 자체를 표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통해서 세계의 내면적 비밀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염세주의 작가들이 써 내려간 수많은 비극이 스쳐 지나간다. 그 허무함이 욕망을 부정하기 위함이었던가.
니체의 예술관이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자살관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고통을 종식하기 위한 궁극의 해결책으로 자살이 아니라 살려는 의지의 부정을 주창한다. 그는 오직 하나의 자살만을 긍정하는데, 그것은 고도의 금욕에 의한 자발적 아사다.

살려는 의지를 부정하기 위한 수행은 욕망을 극복하기 위한 금욕주의적 고행이 된다.
자기보존의 욕망의 대표인 식욕을 억제하는 소박한 식사와 종족번식 욕망의 대표인 성욕을 억제하는 정결 그리고 이기심의 대표인 탐욕을 억제하는 청빈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수행된다. 이렇게 살려는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그것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가 바로 진정한 자유다.
쇼펜하우어가 살려는 의지의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본다.
그는 고통과 권태의 삶이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삶이 원할 만한 것이 아님을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도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241 생은 일종의 꿈이며, 더 나아가 깨어날 때까지 줄곧 가위눌리는 끔찍한 악몽이다. 죽음은 이 악몽에서 깨어나 우리의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죽음을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삶이 고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죽음은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다.


그의 극단적인 문장들을 보면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이고 그 추악함에 허망해지지만 의외로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아니 충분히 비관적이지만 숨구멍을 뚫어주었달까.
고통만 가득 찬 세상이지만 욕망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를 찾고, 세상을 심미적 관조의 상태에서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조건적 염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삶 자체가 고통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삶은 고통이 될 수도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진정으로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준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통찰력은 아프지만 원래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치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72 진정한 철학에는 행간에 있는 눈물의 울부짖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와 다들 죽고 죽이느라 아우성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철학이 아닙니다.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보통날

책소개

불교계 대표 잡지 월간 「불광」에 연재되었다. 연재 당시 독자들의 절대적인 호응은 물론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론과 실천, 교리와 수행이 하나가 된, 그야말로 몸으로 체득한 불교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또 안개 속의 섬처럼 닿을 듯 말 듯한 ‘무아, 연기, 공, 자성, 업, 마음, 유식, 윤회, 열반, 해탈’ 등의 불교 사상을 우리의 일상적 삶에 대입해 명확하게 풀어냈다.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잘 알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 삶을 살아서 부작용 없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이 책이 인문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읽는 순간 ‘앎’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내 삶에 적용하여 자신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진단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계발서’이기도 하다. 삶을 이롭게 이끄는 힘을 자신 안에서 찾게 만드는 책을 진정한 인문서라고 할 때, 이 책은 우리 시대 새로운 명저이자 미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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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라 할 수 있는 사상은 연기緣起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기의 대승불교적 전개가 공空과 유식唯識 사상이다. 연기·공·유식을 형해만 남은 죽은 사상이 아니라 자기 몸속에서 펄펄 살아 숨 쉬게 하여, 연기·공·유식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선禪이다.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책이다.
불교의 교리를 처음 접하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일상적인 실례를 통해 설명하여 이해도를 높였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불교계 잡지인 「불광」에 연재된 글이라 그런지 설명이 매우 친절하다.
교리의 모든 내용을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난 중생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점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연기緣起가 진리다. 불교 교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며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다. 
연기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생겨나다"를 뜻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날 만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연기'에 함축된 의미는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함께 변하고 소멸한다'이다.
'왜 무상한가?'에 대한 답을 굳이 찾는다면 모든 것은 연기하기 때문이다. 조건이 지속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무상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연기한 것이므로 고정된 모습이 없다. 우리의 본래 모습도 이와 같아서 그 어떤 처지나 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과 같다.
우주의 만물은 한 몸인 관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연기의 세계인 것이다.
너와 나는 한 몸이고, 우주와 나는 한 몸이다. 우주가 곧 나고 내가 곧 우주다.

공空사상과 유식唯識사상은 모든 대승불교 교리가 기본으로 삼고 있는,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시조인 용수는 모든 것은 자성이 없는 공이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 생겨날 뿐인 연기가 성립한다고 통찰했다. 
즉 연기란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하며, 무자성인 것이 곧 공이라고 했다. 
연기=무자성=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공空'은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바로 자성自性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은 모든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무자성無自性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자성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말한다.
열반도 공이고, 윤회도 공이다. 열반이 곧 윤회요, 윤회가 곧 열반이다.


106 '일체개공一切皆空', 모든 것은 공이다. 비난도 공이다. 비난은 비난이라는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쉽게 말하면, 비난은 비난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석가모니 가까이 날아간 화살이 꽃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모든 것은 공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부파불교(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완전한 열반은 무성한 이 세상을 괴로움으로 보고 역겹도록 싫어하여 완전히 떠나버리는 것이다. 육신조차 없어져 이 세상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 유부의 이상이었다. 
내 종교가 무색하게도 나와 생각이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 이는 대승불교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하니 대승불교 수행자가 쓴 책을 읽는 독자로서 이런 생각 자체가 옳지 않은 것인가 하는 번뇌가 생겼다.
반면, 대승불교의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은 모든 번뇌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세계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는 열반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이 살아가는 삶이다.
불교 또한 성인의 자비로 중생이 구원받는 종교임에 다를 바 없구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는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는 말이다. 이 구절이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오온이다'가 된다. 
여기서 오온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은 대사일번(大死一番), 즉 한번 내가 크게 죽는 길이다. 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죽는 것에 의해 도리어 모든 것이 참된 진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을 선에서는 절후소생(切後蘇生)이라 한다. 공즉시색은 절후소생에 해당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탐욕과 목적부터 백지화되어야 '색즉시공'은 시작된다. 자신의 탐욕과 목적은 그대로 두고 도리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상대나 관습을 부정하려고 '색즉시공'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색즉시공'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린 태도다.
너무 놀랐다. 내가 색즉시공의 설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을 꿰뚫어 보고 있어서.
중생의 생각이 손바닥 안인가 보다. 깨달은 사람은 다르다.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分別에서 생겨나고, 분별은 희론戱論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희론이란 '말로 대상을 개념화하고 그에 대해 집착하는 것' 또는 '오류를 야기하는 말이나 개념 그 자체'를 가리킨다.
희론을 설명하는 예시로 저자는 실어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로웠다.
언어학자는 실어증 환자에게 '짙은 빨강', '옅은 빨강', '짙은 파랑', '옅은 파랑'의 카드 4장을 분류해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분류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4장의 카드 모두가 서로 다른 색깔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빨강'과 '파랑', '짙다',와 '옅다'와 같은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분류를 할 수 없었다. 정상인은 '빨강'과 '파랑'이라는 말에 의존하기에 분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와 실어증 환자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불교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갈애(渴愛)와 무명(無明)에 있다고 본다. 갈애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말하고, 무명은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을 뜻한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탐(貪, 탐욕)·진(瞋, 화)·치(痴, 어리석음) 3독이다.
탐진치, 즉 갈애와 무명을 바탕으로 한 행동과 말과 생각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악업이다.
사바세계는 '참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은 괴로움 속에서 이를 참고 살아가야 하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괴로움이 영원히 소멸된 상태가 곧 열반이다.
갈애를 있는 그대로 만날 때 갈애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가만히 대면하고 있으면 마음은 멈추고 고요해진다고 한다. 욕망을 마주할 때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나의 심리적·인식적 사건과 그에 대한 반응들에 의해 형성되는 시간을 '유위有爲의 시간'이라고 명명한다. 
'유위의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생각·느낌·판단·지식·가치관 등이 진리를 보는 데 장애가 되는 상들이다. 이런 상들에서 자유로운 눈이 진리를 꿰뚫는 지혜의 눈이다.
유위의 시간이 없는 자는 마음에 아무런 앙금이 없으니 눈앞에 '있는 그대로'보고 듣는다.
석가모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진리가 보인다고 했다.
분노와 질투가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비난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직시하는 것이다.


221 이렇게 순간순간을 사는 그의 마음은 확 트인 허공과 같다. 허공은 새가 아무리 지나가도 그 흔적이 남지 않으며, 천둥과 번개가 무수히 내리쳐도 멍들지 않는다. 허공과 같은 그의 마음에는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지옥도 없고 낙원도 없으며, 모자라는 것도 없고 넘치는 것도 없다. 이 순간이 모든 것이며, 이 순간은 이 순간으로 완결된다.


불교에서는 선을 유류선有漏善과 무루선無漏善으로 나누기도 한다.
'유루선'이란 번뇌가 묻어있는 선을 말하고, '무루선'이란 번뇌가 전혀 없는 완벽한 선을 말한다.
기복불교의 기도는 유루선에 가깝다.
저자는 기복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불교의 힌두화로 생겨난 기복불교, 번뇌가 끼어 있으나 부정할 수 없는 선인 유루선은 마치 천주교의 연옥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종교가 당대의 시대상에 맞게 변화하는 것은 세속적인 걸까, 자비로운 걸까.
그러면 세속적인 삶을 사는 중생을 맞으려 종교가 세속화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이럴 때 종교는 전통문화로 보이기도 한다. 시대에 맞춰 개량되는 모습이 말이다.(이건 너무 불경스러운가?)

유식唯識이란 '모든 것은 마음의 나타남, 즉 마음의 현현顯現일 뿐'이라는 뜻이다.
유식의 8식 중 여타의 마음과는 별도로 존재하면서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선천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는 마음이 바로 제7말나식末那識이다. 
말나식의 자아 집착 작용은 말나식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6식 모두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말나식을 염오의染汚意라고 부르는 것은 탁한 물감이 연못 전체를 물들이듯이 6식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말나식의 작용이 멈춰, 번뇌의 때가 전혀 끼지 않은 무루선無漏善을 행해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자의식 그 자체를 번뇌의 씨앗이며 어리석음, 아집, 교만 등으로 보고 오염과 암으로까지 표현하는 것에 놀랐다.
무아가 옳은 것이므로 자아의식이 이토록 비판받는 것이다. 
중생인 나는 정말 모르겠다. 번뇌가 괴롭긴 한데, 지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자의식이 만든 번뇌라면 그게 나쁜 건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불교 관련 영상도 좀 보게 되었는데, 어찌나 마음이 편하고 재미있는지 타 종교인으로서 이렇게 장점만 골라서 취해도 되는 건지 양심에 찔렸다.
일단 부처님은 용서해 주시겠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말이 '무연대비'다.


53 '무연대비無緣大悲'라는 말이 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베푸는 자비'를 뜻한다. 내 부모나 자식이기 때문에, 같은 종교를 믿기 때문에 베푸는 자비가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 그냥 베푸는 자비다.


무연대비야 말로 진정한 종교의 자세가 아닌가.
알다시피 종교전쟁으로 역사는 피 흘렸고, 같은 종교 안에서의 분파싸움도 여전히 거세다. 그 원인이 종교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한편으로는 그런 가르침을 다 지키고 살면 그게 부처고 교황이지 싶은 게 우리는 중생이자 어린양이라 별수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중요한 교리를 그중에서도 핵심만 정리하려고 했는데도 워낙 용어 설명이 많아 내용이 방대해졌다.
사실상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유식사상의 '3업'과 '8식', '아뢰야식 연기설' 같이 이론 중심의 중요내용은 다 생략해 버렸음에도 말이다.
불교의 교리는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다들 화가 가득하고 되갚아주지 못해 안달인 이 시대에 내 속에 화를 없애면 화를 참지 않아도 된다.
업보를 쌓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지옥이니 굳이 그걸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를 부르는 숲 보통날

책소개

“세계에서 가장 유러머스한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그의 대표작인 『나를 부르는 숲』은 세계에서 가장 길며,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지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한 저자의 고군분투기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미국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이어지는 총 길이가 3,50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장정의 길이다. 저자는 자신의 동네에서 우연히 숲으로 사라지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이 바로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대장정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인간적인 결점을 가진 친구와 함께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불완전한 지도, 시시때때로 그들을 위협하는 흑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자비한 벌레들, 야만적인 날씨 등 그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에서 자연을 걷는다는 순수한 인간적인 즐거움을 찾는다. 국립공원의 장대한 자연 그리고 숲과 나무가 주는 아름다움과 그에 버금가는 인간들의 유쾌하고 때로는 이해 불가능한 어리석은 행동들이 어우러지며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엄청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리고 자연의 보존이라는 위대한 교훈을 절절히 체감하게 된다. 1,400킬로미터의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빌 브라이슨이 직접 발로 밟아가며 담아낸 이 담대한 종주기에는 유쾌함은 물론이고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침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의 유머와 재치에 소리 내 웃으며 읽었다.
등산을 준비하는 시작부터 너무너무 재미있다.
메리 로치의 필체와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그야말로 사르카즘의 절정이다.


19 사실 숲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방울뱀, 물뱀, 독사, 살쾡이, 곰, 코요테, 늑대, 멧돼지, 거기다가 거친 곡주를 너무 많이 마셔 약간 돈 산사람과 스컹크, 너구리, 다람쥐, 무자비한 불개미, 흑파리, 독이끼, 독참나무, 옻나무, 불도마뱀……. 그뿐만이 아니다. 양순할 것 같은 사슴들도 뇌에 기생충이 파고들어 정신이 돌 경우에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 돌진한다.


빌 브라이슨이 종주를 결심한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3,448킬로미터(혹은 3,389킬로미터~3,520킬로미터)의 길이로, 산들이 대체로 높은 편이며 1,5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350개나 된다.
종주하려면 적어도 5개월이 걸리고, 필요한 걸 모두 짊어지고 걸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배낭은 못해도 18킬로그램이 된다.  
저자는 등산 장비를 준비하며 트레일에 관련된 도서와 지도를 구입한다.
이 중 <곰의 습격>이라는 책은 그를 공포에 떨게 했는데, 트레일 하는 동안에도 종종 그를 두렵게 만든다.


28 돌아오는 길에 『곰의 습격 : 원인과 대피 방법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 아무렇게나 펼쳤더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흑곰이 사람을 보고 죽여서 먹기로 결심한 일반적인 사건 유형의 명백한 사례 중 하나다."
 나는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혀 바로 그 책을 쇼핑 백에 던져넣었다.


1부는 빌 브라이슨과 친구 카츠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적응기를 다룬다. 
서툴기에 더욱 고단한 등산과 다사다난한 사건들에 적응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다양한 군상의 인물과 미처 대비하지 못한 날씨 등으로 위험해지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한 헤프닝이 여행기를 풍요롭게 한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역사와 트레일이 지나는 숲의 생태환경, 관리상황 등 현실을 꼬집어 지적하고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모습도 보인다.
특히 국립공원관리국과 산림청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89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의 백미가 상실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모든 경험이 바로 자신을 철저히 일상생활의 편리함에서 격리시키는 것, 그래서 가공 처리된 치즈나 사탕 한 봉지에 감읍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코카콜라 한 잔에 마치 처음 마셔보는 음료수인 것처럼 넋이 나갔고, 흰 빵으로 거의 오르가슴을 느낄 뻔했다.


어설픈 하이커인 그들의 모습에서 공감과 친근함을 느꼈다.
트레일을 시작한 그들에게 숲은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저자의 위트있는 문체가 빛을 발한다.


74 숲은 여느 공간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입체적이다. 나무들은 당신을 에워싸고 위에서 짓누르며 모든 방향에서 압박한다. 경치를 가로막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한다. 당신을 왜소하고 혼란스럽고 취약하게 만들어놓은 다음, 마치 낯선 사람들의 무수한 다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사막이나 초원에 서면 광활한 공간 속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지만, 숲 속에 서면 당신은 오직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 고작이다. 숲은 거대하면서도 특징 없는 게다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다.


두 사람은 트레킹 중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을 한층 더 고단하게 만드는 매리 앨런이라는 별종을 만나고 눈이 쌓인 산에서 큰 도움을 준 짐과 히드 부자, 웨인즈버러에서 카츠의 생명을 위협한 뷸러와 남편, 대피소에서 빗속으로 그들을 쫓아낸 6명의 소란스러운 그룹 등 그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카츠는 그들의 소중한 컵케이크를 메리 앨런에게 빼앗긴 후 며칠간 웃음을 잃었다.

저자가 다닌 도시 중 인상적인 도시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 불타고 있는 도시 센트레일리아이다.
도시 아래에 매장되어 있는 24만 톤의 무연탄에 불이 붙었으나 끌 방법이 없어 미 연방정부는 결국 4,200만 달러를 들여 사람들을 소개(疏開)시켰다.
도로의 균열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출입 금지된 건물들을 돌아보던 저자는 자신이 34년 동안 타고 있는 불가마의 한가운데에서 아스팔트의 얇디얇은 막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돌아간다.

2부에서 두 사람은 잠시 등산을 쉬고 저자 홀로 트레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차를 이용하기도 하고―그럴듯한 지점에 차를 주차해 놓고 봉우리까지 등반한 뒤 다시 차로 돌아와 조금 차를 몰고 간 뒤 그 과정을 반복한다― 산으로 통근하기도 하며 등산을 이어간다.
메인 주로 갈 때는 카츠와 다시 함께 떠난다.
악명높은 헌드레드 마일 윌더니스로 떠난 두 사람은 물속에 빠지고 서로를 잃어버리는 등 고생을 하다 결국 트레일을 떠나는 것으로 등산을 끝낸다.


339 메인 주의 트레일 관리인들은 가장 바위가 많은 오르막과 가장 험한 경사면만을 골라 길을 내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 메인 주에는 이런 길들이 엄청나게 많다. 메인 주에 있는 애팔래치아 트레일 452킬로미터 중에서 에베레스트를 세 번 넘는 것과 마찬가지인 3만 미터가 오르막길이다. 


저자는 자연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비판한다. 
미국에서 자연은 양자택일 적 제안-탁스 댐이나 수많은 다른 곳에서처럼 성급하게 정복하려고 하거나 애팔래치아 트레일처럼 인간과 동떨어진 곳으로 신성시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어느 쪽이든 사람과 자연이 서로가 이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자연스레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게 되었다.
지리적 특성이 있겠지만 한국은 수많은 산과 등산로를 인간의 생활 구역과 잘 어우러지게 조성하고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는 점에서 참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나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레이록은 애팔래치아에서 가장 문학적인 산이다.
1850-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뉴잉글랜드와 관련 있는 문학인들 중에서 그 경치를 감상하려고 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저자의 찬사에 찾아보았더니 너무 아름다워서 첫눈에 반했다.
특히 가을의 그레이록은 그 아름다움이 절정이다.

수목한계선을 지나 춥고 돌풍이 부는 화이트 산맥에서의 사투는 이 책에서 가장 박진감이 넘치는 파트다.
저자는 라파예트의 산장을 찾아 시계는 4.5미터밖에 안 되고 바람은 면도날이며 300미터를 올라갈 때마다 기온은 1.33℃씩 떨어지는 능선을 벌벌 떨며 비통한 심정으로 걷는다.
비옷도 없이 고통스럽게 걷고 있는 저자에게 동행자인 빌이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322 "좋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당황해서, 수줍은 미소를 띠며 "저세상에서 만나세, 오랜 친구야"라고 외친 뒤 비탈 너머로 뛰어내리기 직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산 정상에서 환자를 잃어버린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놀라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브라이슨과 함께 등산하는 기분으로 그 유쾌한 필체에 깔깔 거리며 즐겁게 책을 읽었다.
평소에도 혼자 등산을 다닐 정도로 산과 숲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의 모든 것이 날 즐겁게 했다.
단 트레일의 역사나 현재 미국 숲의 생태 등 학술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할 때는 좀 지루해서 언제 트레일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생각보다 분량이 많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만큼 흥미롭지 않았고 재미있는 트레킹 부분은 술술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등산이 끝난 뒤 저자는 킬링턴 피크로 마지막 등산을 간다.
처음에 숲을 두려워하고 등산을 지난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저자의 생각 변화가 흐뭇했다.


387 너무 아름다워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끝없는 전경이 단지 애팔래치아의 전체 구간에 비하면 일부분에 불과하고, 내 밑으로 자유분방하고 훌륭하게 관리된 트레일이 3,520킬로미터나 거의 똑같이 장엄한 숲과 산봉우리를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신이, 내가 태어난 대지를 얼마나 편애하고 있는지 이보다 더 선명하게 느낀 순간은 내 일생에 없었다. 멈추어야 할 완벽한 곳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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