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보통날

책소개

4일의 추억, 22년의 그리움 1백만 한국 독자를 뭉클하게 했던 단 하나의 사랑이야기

젊은 시절 꿈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프란체스카. 남편과 아이들이 박람회 견학 겸 짧은 여행을 떠난 사이, 모처럼의 휴식을 맞이한 그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운명의 사랑이 찾아온다. 물 빠진 청바지와 낡은 레드윙 부츠, 손 때 묻은 니콘 카메라와 카멜 담배, 낡은 픽업트럭……. 오래된 다리의 사진을 찍겠다며 아이오와 주 시골 마을, 고립된 낡은 도로 같던 그녀의 삶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남자, 로버트 킨케이드.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던 그의 인생에도 처음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이가 생겼고, 프란체스카는 다시 춤을 추고 싶어졌다. 그도 그녀도 더 이상 젊지 않고, 첫 무도회의 설레임은 이미 자라날 아이들의 몫이 되어버렸음에도.

영화로, 뮤지컬로, 세기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신화
2017년 4월, 옥주현, 박은태 국내 정상급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막을 연다. 이미 2014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그해 토니 어워드 작곡상, 오케스트레이션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첫 한국 공연임에도 이미 상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
1992년 첫 출간될 때만 해도 가정이 있는 주부와 중년 남성의 사랑이라는 설정만으로 파란을 일으켰던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원작 소설은 초기의 근심 어린 시선을 떨치고 보수적인 미국 출판계에서 3년 연속 베스트셀러(뉴욕타임스 164주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세기의 로맨스로 각광을 받기에 이른다. 작품 속에서 킨케이드의 사진을 실은 것으로 나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지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팬들의 문의에 시달려야 했을 정도.
인터넷을 넘어선 SNS의 시대, 더 이상 그가 실존하는 인물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메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동명 영화조차 이제는 고전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작가 제임스 윌러는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의 사랑을 지지하는 팬레터를 받곤 한다. 십여 년 전 그들의 사랑에 설레었던 한국의 첫 독자들이 여전히 그의 소설을 인생 책으로 꼽는 것처럼.

[출판사 제공]


동명의 영화와 뮤지컬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기대가 매우 컸던 책이다.
더욱이 두 장르에서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이 정말 크다.

먼저, 뮤지컬의 경우에는 인물들에게 서사가 있다.
프란체스카라는 인물이 뮤지컬 속에는 있는데, 책 속에는 없다.
책 속엔 단지 로버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 프란체스카만 존재한다.
주변인물 또한 서사가 없으니 살아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단지 평면적인 배경과 다를바 없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만나 느낀 사랑의 충격과 왜 평생을 그리워했는지 이해하기엔 책이 너무 단순하다.
반대로 이런 원작에서 저렇게 재미있는 뮤지컬이 나온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의 경우엔 책과 마찬가지로 서사가 없지만 관능적이다.
관능적인 이미지가 강렬해서 책을 읽을 때조차 로버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으로 떠올라 짜증이 날 정도였다.
메릴스트립의 연기력이 크겠지만 심지어 클린트 이스트우드임에도 불구하고 관능적이니 말이다.
게다가 스킨쉽이 별로 없는 뮤지컬마저도 보는 내가 황홀할만큼 로맨틱했는데, 이 소설은 소설임에도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았다.
보통 원작소설이 타 장르보다 좋기 마련이지만 소설이 가장 별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자체만 보면 아쉽긴해도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품인지라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니까.

이 소설은 사실 불륜 이야기다.
그래서 처음에 접근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는데, 처음 이 작품을 접한게 뮤지컬이었다.
뮤지컬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자극적인 장면을 줄이고 서사에 집중해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남편과 가족의 서사 또한 들어가기 때문에 몇 번 더 관극을 할수록 남편에게 감정이입이 되서 슬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소설은 주위 인물들을 완전히 배제하여 두 사람의 사랑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다.
소설이 단순화되는 대신 프란체스카의 불륜이라는 오점을 최소한으로 작게 노출시킨다.
그러면서 로버트를 완벽하게 멋진 남자로 만들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판타지를 최대한으로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 점이 이 작품의 재미있는 요소이기도 하고 줄거리만 접했을 때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로버트와 프란체스카가 처음 만나 로버트의 트럭을 타고 로즈먼 다리로 가는 부분이다.
여기서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담배를 권하는데, 그 찰나의 순간이 굉장히 에로틱하다.
프란체스카의 긴장감이나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기가 느껴진다.
보지도 않고 불을 붙여주는 로버트는 또 왜이리 멋있나.

52 그는 다시 한 번 담뱃갑을 탁탁 털더니 한 개비를 입술에 물고 금장 지포 라이터를 켜서 그녀 쪽으로 불을 내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도로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바람을 막기 위해 라이터 주위를 양손으로 둥그렇게 싸고, 트럭이 덜컹거려서 불꽃이 흔들거리는 것을 바로잡으려고 그의 손을 잡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간은 한순간이었지만, 그 정도로 그의 손의 따스함과 손등에 난 작은 털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로버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방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지도 않고, 프란체스카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될까봐 걱정하고 배려하는 섬세한 사람이다.
편지는 또 얼마나 로맨틱한가.
이런 편지를 보내는 그를 포기할 수 있는 프란체스카가 대단하다.

41 어떻게든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하오. 어디서든, 언제든. 
 뭐가 필요하거나 그냥 나를 보고 싶거나 하면 내게 전화해요. 난 언제든지 당신이 부르는 곳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소. 언제 여기 올 수 있는지 내게 알려 줘요. 언제라도.


1965년의 시골 아이오와에서 프란체스카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뻔하다.
그 시기가 그렇기도 하고 보수적인 마을에서는 더더욱 여자에 대한 처우가 좋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내와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서의 삶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버트가 보여준 사랑과 존중과 배려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로버트가 프란체스카에게 건내는 수많은 다정한 말들 중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174 하지만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고, 또 당신의 감정을 존중해요. 어쩌면 당신 말이 옳았는지도 모르겠소. 그 무더운 금요일 아침, 당신 집 앞길을 빠져 나왔던 일이 내가 지금까지 한 일과 앞으로 할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고 있소. 사실, 살면서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을 겪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지 의아스럽소.


두사람이 단 나흘간의 사랑을 평생 간직하고 죽을때까지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간 이유.
이 작품을 대표하는 로버트의 대사다.

149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껴안았다. 킨케이드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할 이야기가 있소, 한 가지만. 다시는 말하지 않을 거요, 누구에게도. 그리고 당신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로버트 이야기만 하는 이유는 그만큼 소설속의 프란체스카가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 이 소설을 사랑한 수많은 독자들은 분명 여성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선 메릴스트립의 프란체스카만 보여서 아쉬웠다면 소설은 그야말로 로버트 킨케이드만 보인다.
아쉬운 마음에 후속편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을 읽어볼까 생각했는데, 줄거리를 찾아보고 그만뒀다.
아쉽다 아쉬워.

환상의 빛 보통날

절판 되었던 책이지만 빨간책방에 소개된 이후로 2014년 재판 되었다.
리뷰가 너무 좋아 마음에 담아 두었었는데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보고 바로 구매했다.


출판사 서평

『설국』의 서정을 잇는 현대 일본 서정 문학의 진수 『환상의 빛』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 중 한 편으로 평가받는 「환상의 빛」의 원작 단편집 『환상의 빛(幻の光)』이 서커스에서 출간되었다. 수많은 국제 영화제 수상 경력을 포함하여 현재 일본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연출작인 「환상의 빛」은 베네치아, 밴쿠버, 시카고 국제 영화제 등에서 수상했으며 국내에서도 시네필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작품이다. 원인 불명의 자살로 남편을 잃은 젊은 여자의 상실감을 독특한 서정적 영상으로 묘사한 「환상의 빛」은 삶과 죽음이라는 대극이 지척에 있을 수 있다는 삶의 불가해함을 절제된 스타일로 보여주어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과 감동을 안겨 주었다.
소설 「환상의 빛」은 영화 언어로는 부득이하게 생략될 수밖에 없었던 디테일들을 담고 있어서 오히려 영화보다도 단연 낫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영화와 달리 죽은 남편에게 말을 거는 여성 화자의 독백체로 된 소설의 어조는 때로는 담담하고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아이 같지만 그런 목소리 속에서도 불쑥불쑥 죽은 남편의 부재에 대해 대답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모습은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초반에 잠깐 다뤄진 할머니의 실종 사건은 소설 전체의 테마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략된 것이 아쉬웠는데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도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 외에도 주인공 유미코의 초경 이야기나, 유미코가 소소기로 재혼하러 갈 때 만난 재일 한국인 아줌마의 강인한 모습 등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은 영화 언어보다 우월한 소설의 서사성만이 줄 수 있는 감상의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환상의 빛」은 오랜만에 소개되는 서간 문학의 참맛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을 띤 이 작품은 왕복 서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온전한 의미의 서간 문학은 아닐지도 모른다. 수취인 또한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이라는 점은 그러한 면모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하지만 수취인 부재의 편지라는 형식은 발신인의 간절한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는 주체가 부재한다는 이 소설의 정조인 애절함과 안타까움, 쓸쓸함을 더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란 생각보다 멀지 않으며 죽음은 삶의 외곽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을 수 있다는 이 책의 주제로 볼 때 이 수취인 부재의 편지 형식은 단순히 특정한 개인을 향한 발신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존재를 향한 편지라는 함의를 띤다고도 할 수 있다. 김혜리 씨의 추천의 글대로 이 소설은 ‘기도’에 가까우며 그 기도가 향하는 대상은 어떤 절대자를 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미야모토 테루는 20세기 후반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통해 일본적 서정을 보여준 것처럼 산문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현대 일본 서정의 진수를 보여준 작가이다. 「환상의 빛」은 그런 미야모토 테루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수록된 작품들

표제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해 총 네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상실과 이별에 얽힌 추억들을 다룬 작품들로 우리가 살면서 불가피하게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에 관해 다룸으로써 삶의 의미를 묻고 인간 존재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환상의 빛」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오사카에 사는 이십대의 젊은 아내 유미코는 어느 날 밤 늦게 남편이 전차에 치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남편의 사체에서는 약물도, 알코올도 검출되지 않았다. 도박도 하지 않고, 여자관계도 없고, 죽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는커녕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세 달밖에 안 되는데 남편은 아무런 단서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치일 때까지 전차 선로 위를 묵묵히 걷다가 죽었다.
유미코는 재혼해서 소소기 바닷가에 있는 작은 어촌에서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지만 행복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전 남편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죽은 남편을 향해 이제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이 일상의 틈으로 삐죽이 나오지만 결국 그 대답은 들을 수가 없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목욕탕에서 들려오는 새남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죽으려는 사람의 그 마음의 정체를 알려고 필사적으로 이리저리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쓸쓸함과, 마음조차 전달할 수 없는 애절함과 안타까움이 유미코의 독백을 통해 절절히 울리는 가운데 삶과 죽음의 경계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화두가 대자연의 거친 바다를 배경으로 환상적으로 떠오른다.

「밤 벚꽃」

아들의 일주기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야코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하숙인을 들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그런데 젊은 전기수리공이 하숙인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와서는 단 하룻밤만이면 되니 아야코의 집에서 잘 수 있겠느냐고 요청한다. 청년의 희한한 요청에 아야코는 이상이 있는 가전도구들을 고쳐주면 생각해보겠다고 장난처럼 대답해버렸는데 청년은 진짜로 집의 가전도구들을 다 고쳐주고 저녁때 오겠노라며 돌아간다. 그때부터 아야코는 집안에 낯선 타인을 들이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해 저물 무렵 청년이 이불보따리를 들고 나타나는데 낮에는 아무런 언급도 안 했던 젊은 여성을 데리고 온다. 자신의 집을 러브호텔 취급하는 것 같아 기막혀 하는 아야코에게 청년은 여자를 소개한다. 오늘 구청에 가서 혼인 신고를 한 자신의 아내라고. 벚꽃이 아름답게 핀 정원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싶어하는 가난한 청춘의 모습과 상실의 노년을 겪는 화자의 처지가 화려한 밤 벚꽃을 배경으로 절묘하게 펼쳐진다.

「박쥐」

나는 도심에서 우연히 재회한 친구로부터 중학교 때의 친구 란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는다. 불륜의 상대와 밀회를 즐기러 가던 나는 죽은 친구에 얽힌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뜨거운 여름, 수업이 끝나고 란도는 자신과 함께 한 여자아이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한다. 주소만 들고 오사카 교외의 빈민가를 헤맨 끝에 여자아이의 집을 찾고 란도는 그 여자아이와 함께 은밀한 곳으로 가버린다. 란도와 여자아이가 숨어 있을 하늘 위로 박쥐가 무수히 날고 나는 란도가 건네주었던 단도로 란도의 가방을 찢어버린다. 사춘기의 어렴풋한 성욕과 불륜을 저지르는 현재가 그 뜨겁던 여름날 박쥐가 날던 하늘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침대차」

거래처와의 회의를 위해 도쿄로 가는 밤기차를 탄 나는 기차 안에서 불쾌한 직장 상사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같은 칸에 탄 노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노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를 떠올린다. 부모 없이 의사인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집에 놀러 왔다가 익사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난다. 사고 이후 그 친구와는 서먹해져 서로 안부를 모르고 지냈는데 대학생 시절 그 친구가 기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할아버지와 나는 예전의 사고에 관해 얘기를 나눈다. 바쁘고 치열한 직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상실감을 느끼는 일상인의 감정과 소중한 손자를 먼저 떠나보낸 할아버지의 처연한 모습을 오버랩시켜 보편적인 삶의 상실감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예스24 제공]


추천평

「걸어도 걸어도」와 「원더풀 라이프」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소설 「환상의 빛」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장편 연출 경력을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불현듯 남겨진 자가 삶에 끝없이 메아리치는 비극적 순간의 의미에 대해 곱씹는 이야기니까. 이때 미야모토 테루가 눈을 두는 것은 난폭하게 틈입한 짧은 순간이 아니라, 그곳을 향해 나선형을 그리며 고통스럽게 맴도는 긴 세월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걸쳐 있는 박명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그는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 생의 진창 속 시린 발목을 이제 그만 문질러 없애고 공기 속으로 휘발되고 싶은 피로가 있다. 하지만 그 빛 너머로 훌쩍 넘어갈 수 없는 지금, 대답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말을 걸고 또 건다. 미야모토 테루가 그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그랬다. 해답이 끝없이 미끄러지는 질문들의 연쇄가 결국 문학을 만들고 영화를 빚는다. 아마 삶도 그럴 것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


필사적으로 침묵을 경청해야 하는 영화들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도 그랬다. 가늠조차 못할 이유로 남편을 잃어버린 유미코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검고 긴 옷으로 몸을 감싼 그 여자의 혼잣말과 인생을 향해 던졌을 힐문들을 오랫동안 상상했다. 영화를 먼저 접한 한국 독자에게 소설 「환상의 빛」은 뒤늦게 도착한 유미코의 편지다. 하지만 그것은 서러운 독백도, 죽은 남편을 그리는 ‘미망인’의 연서도 아니다. 유미코의 수취인은 차라리 신(神)이다. 쓴다는 행위를 통해 버틴, 기도에 가까운 문체의 이 소설은 두려운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인간은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죽고 싶어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생의 무도한 불가해함은 가혹한 허방인 동시에 매일 몸을 일으켜 다시 살게 만드는 요염한 신기루-환상의 빛이라는 것.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

[예스24 제공]


서평과 추천평이 너무 좋아서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서평은 보통 그 책의 편집자가 쓰는데, 책에 적혀 있지 않아서 찾아보니 바다출판사의 여미숙 편집자의 글이 보인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이분인 듯하다.)
이런 좋은 퀄리티의 서평과 추천평이 나올만한 매우 좋은 책이다.

남편이 죽기 열흘 전 자전거를 도둑맞은 그는 고시엔에서 자전거를 훔쳐온다.
때때로 사팔눈이 되어버리는 남편의 눈이 그 날따라 심하게 쏠려 유미코는 무심코 큰 소리를 낸다.
남편은 기분이 상해 눈을 비비며 자신은 부자가 되긴 글렀다고 말하는데, 유미코는 결혼하고 나서 자신은 더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여느 때 같으면 금세 돌아오는 눈이 그날은 아무리 비벼도 고쳐지지 않는다.
유미코는 이 때 왼쪽 눈에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소설에서 남편이 자살한 이유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아내는 재혼 후에도 계속 죽은 전남편에게 말을 걸지만 혼잣말이 새어나갈 뿐 답변은 들을 수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의 복선이 익숙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낯선 시선과 사팔눈의 이질감으로 표현 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그들을 감싼 가난에 대해 설명하는 사건 중에서 가난에 대한 감정을 표면적으로 표출하는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19 당신이 말한 대로 삼십 분도 안 되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조금 전의, 당신이면서도 당신이 아닌 다른 얼굴이 언제까지고 마음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그렇게 이상한 발작을 일으키는 눈이 사실은 당신의 본성일 거라고,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러고 나서 열흘 후에 갑자기 자살해버릴 낌새를, 왜 저는 바깥으로 쏠린 왼쪽 눈에서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난 이상하게 소설 속에서 익숙한 인물에게 사시 증상이 있는 게 좋다.
익숙한 사람으로부터 낯선 시선을 설명하는 글이 좋다.
시선을 명확하게 눈치챌 수 없는 그 모호함이 좋다.
그 이질감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과 인물이 느끼는 수치에 대한 묘사도 좋아한다.
마치 평범한 사람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변하는 마법같다.


유미코는 재혼을 하게되어 소소기 바닷가의 작은 어촌마을로 가게 된다.
처음으로 찾아간 집에서 만나게 된 새 남편의 딸 도모코가 마루에 앉아 자신을 살피자 옆으로 다가간다.
"오늘부터 내가 네 엄마야"라는 말에 얼굴을 들고 웃어주는 도모코를 보고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소설 내내 느껴지는 공허함과 쓸쓸한 정서가 안심하는 두 사람의 공기로 잠시나마 해소된다.
유미코의 마음도, 도모코의 마음도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재혼 후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 유미코는 어느 날 찻집에서 사팔뜨기인 남자를 보게 된다.
유미코는 그 남자가 죽으러 온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어 남자를 뒤쫓아간다.
눈과 파도의 물보라를 맞으며 흠뻑 젖은 채 그 남자에게서 죽은 남편을 투영하며 따라 걷는다.
그러다 문득 남편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선 옆으로 가 큰 소리로 운다.
소설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부분이다.
유미코는 남편의 자살 이후 그에게 줄곧 질문을 던지며 담담하게 아픔을 되새긴다.
하지만 이 장면만큼은 차곡차곡 쌓인 감정의 물꼬가 터진 듯이 격정적으로 아파하고 슬픔에 몸을 내던진다.
마치 파도의 물보라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책을 읽고 있는 내 옷까지 흠뻑 젖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울고있는 유미코를 발견한 남편 다미오와 집으로 돌아오자 감정적인 모습은 다시 이성을 되찾아 현실로 돌아간다.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60 아마가사키의 그 터널 나가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 눈물과 흐느낌, 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언제까지고 울었습니다.


특히 좋아하는 단락이 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닌, 특별할거 없는 문단이다.
한겨울 아침에 창문을 열자 싸늘하고 청량한 공기가 폐속 깊이 돌고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문장이고,
쓸쓸함과 공허함에 속이 시린데 어깨가 따뜻해서 불안한 마음에도 안심할 수 있는 온기가 느껴지는 문장이다.
쌓인 첫눈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68 저는 일어나 석유스토브에 불을 붙이고 다미오 씨의 카디건을 걸치고 덧문을 열었습니다. 한겨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화창한 아침놀이 늪처럼 고요해진 바다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아침놀에 물들어, 불타는 숯불이 전면에 깔린 듯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시뻘건 첫눈이 길에도 지붕에도 방파제에도 모래사장에도 쌓여 있었습니다.


유미코는 다미오에게 그 사람이 왜 자살했을까 묻는다.
다미오는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라고 대답한다.
유미코는 그런 병에 걸린 사람에게 사람을 속이는 소소기 바다의 빛나는 잔물결과 같은 빛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남편이 기찻길에서 보았을 환상의 빛을 설명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결국 남편이 죽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미코는 살아가고, 행복해진다.
그리고 여전히 죽은 남편에게 말을 건낸다.
치매걸린 할머니의 상실 직후 교대하듯 만난 전남편의 반복된 상실은 유미코에게 메울 수 없는 공허를 만들었다.
소설은 우리가 중요한 무엇인가를 상실했을 때 그 상처는 회복 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임을 보여준다.
너무나 사랑했던 남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은 사람이 감당해야할 공허가 평생의 과업이라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81 그리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소소기 바다의 그 한순간의 잔물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세 편의 단편도 죽음 곁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 괜찮았지만 특히 환상의 빛이 너무 좋아서 다른 단편은 이야기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만 더 이야기 하자면 문체가 굉장히 좋다.
공손하고 서정적인 말투에서 오는 소설의 분위기와 여운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작가도 작가지만 번역도 굉장히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도 극찬을 받은 것 같지만 소설의 큰 장점인 서간체의 매력이 없어 개인적으로는 별로였다.

오이디푸스 왕 보통날

출판사 서평

현대 극문학의 전신인 희랍 비극을 완성한 위대한 작가 소포클레스
완벽한 비극의 모범이라 일컬어지는 「오이디푸스 왕」을 포함하여
진실을 좇는 인간의 복잡하고 모순된 내면을 깊이 통찰한 네 편의 비극 수록


미국대학위원회 선정 SAT 추천 도서ㆍ서울대 권장도서 100선ㆍ연세대 필독도서 200권

▶ 「오이디푸스 왕」은 발견과 급전을 가진 가장 완전한 비극의 전범이며, 호머의 서사시보다 훨씬 우월하다.
- 아리스토텔레스

▶ 「안티고네」는 윤리적 갈등을 통해 사회 역사의 변화에 따른 집단의 갈등을 제시한 최고의 작품이다.
- 헤겔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희랍의 삼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대표작들을 수록한 『오이디푸스 왕』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217)으로 출간되었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절정기로 향해 가던 기원전 5세기의 복잡하고 모순된 경험들을 동시대 다른 어떤 극작가들보다 심오하게 통찰해 그려 내고 기교와 형식 등 다방면에서 희랍 비극을 완성해 긴 생애 동안 희곡을 통해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평생 120편이 넘는 비극을 썼는데, 현재까지 전문이 남아 있는 작품들 가운데 희랍 비극의 완벽한 모범이라 불리는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해 「안티고네」, 「아이아스」, 「트라키스 여인들」 등 뛰어난 구성과 치밀한 묘사, 심오한 주제 의식이 두루 빛나는 결정적 작품 네 편을 수록했다. 이들 작품은 서양 고전학자 강대진이 희랍어 원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서양 고전과 신화에 관한 오역과 오류를 바로잡으려 애쓰는 역자인 만큼, 무조건 술술 읽히도록 지나치게 가공된 문장이 아니라 다소 낯설고 거칠더라도 표현의 본뜻과 속뜻을 해치지 않도록 가능한 한 희랍 원문에 가깝게 옮긴, 역자가 말하는 ‘한 걸음마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게 하는 문장’들을 통해 소포클레스의 걸작들을 보다 깊이 있게 만날 수 있다.

희랍 비극을 완성한 종합예술가 소포클레스

희랍 비극은 다양한 현대 극문학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작품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한 희곡이자 각각의 문장이 운율을 가진 시이며,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코로스의 가무는 오늘날의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쉽사리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희랍 비극의 형식은 아테나이 황금기의 여러 작가들을 거쳐 소포클레스의 손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소포클레스가 활동하던 당시는 문학을 비롯해 모든 예술이 전무후무할 만큼 화려하게 꽃핀 시대였다. 아테나이에서는 해마다 디오뉘소스 축제가 열렸는데, 소포클레스는 이때 상연하기 위해 희곡을 쓰고, 연극에 삽입할 음악과 무용을 고안하고, 그의 연극에 출연할 모든 배우와 합창단원들을 지휘하고 훈련시켰으며, 때로는 직접 역을 맡아 연극에 출연하면서 전 생애를 보냈다. 스물여덟에 비극 경연 대회에서 선배 아이스퀼로스를 물리친 그는 월등한 창조성으로 아이스퀼로스나 후대의 에우리피데스보다 훨씬 오래 활동하며 더 많은 작품을 썼고 경연 대회에서도 더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소포클레스는 평생 120여 편의 비극 작품을 썼으며, 기본적인 기법과 격조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긴장감을 지닌 상황 속에 다양한 인물들의 성격과 심의(深意)를 절묘하게 담아내는 희랍비극의 독특한 형식을 완성시켰다. 아이스퀼로스의 삼부작 형식을 각각 완전한 형식을 갖춘 세 편의 희곡으로 바꾸었고, 아이스퀼로스가 대사를 말하는 배우 두 명을 채택한 것과 달리 여기에 세 번째 배우를 추가하여 극적 갈등의 범위를 넓혔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소포클레스를 다른 비극작가들보다 높이 평가하고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전범이라 칭송한 것은 바로 이처럼 완벽한 형식 때문이다.

진실을 찾기 위해 스스로 불행을 택하는 인간의 복잡하고 모순된 내면을 통찰한 작품

소포클레스는 고전 문명의 본질적 요소인 신과 인간의 관계(종교), 인간과 인간의 상호 작용(사회) 등을 시대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낳으며 영원히 회자되는 위대한 희곡 작품으로 바꾸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끊임없이 옷을 바꿔 가며 무대에 오르는 것은 작품의 주제가 시공의 구애 없이 인간의 근원적인 내면을 꿰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항상 위기, 특히 고통이나 그 고통의 절정인 죽음의 위기를 이야기한다. 그의 희곡에서는 신이나 자연력의 작용보다 대표적인 인간상들 간의 상호 작용이 흐름의 중심에 선다. 신들은 영원한 힘과 현실 구조를 구현한 화신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반면, 인간은 이런 힘과 구조에 의해 차단되고 시간과 변화, 고통과 죽음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어두운 무지 속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볼 때 작품 속 인물들은 언뜻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운명에 휩쓸리는 나약한 인간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이들은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스스로 위험한 선택을 하며 굴욕적인 삶을 사는 대신 자신이 택한 파멸적인 결과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소포클레스 비극에서 불행과 고통, 죽음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며 무의미하지 않다. 불행과 고통, 죽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변화(거짓된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낳거나 변화의 조짐이 된다. 죽음 같은 고통(정신이나 육체의 고통 또는 정신과 육체의 고통)은 진실에 대한 이해를 낳는 동시에 ‘재생’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소포클레스가 상상해 낸 오이디푸스는 전설에 나오는 모순된 오이디푸스, 즉 인간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가장 비참한 인간, 아무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풀지만 정작 자신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 범죄자를 쫓는 범죄자이며, 그와 동시에 공격적이면서도 너그럽고, 오만하지만 자신이 놓친 진실을 찾는 일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며, 모든 것을 잃고 추방되는 마지막 순간에 외려 끈기를 회복하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되었다. 결국 소포클레스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실을 찾기 위해 자기 의지대로 삶을 이뤄 나가는 주체적 인간상을 보여 준다.
소포클레스는 자유롭게 각색한 신화들을 자신의 독특한 주제 의식과 복잡하게 뒤섞어 완벽한 비극 형식 안에 녹임으로써 겉으로 보이는 줄거리만으로는 그 속에 담긴 참뜻의 가닥조차 잡을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인 희곡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오이디푸스 왕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도시가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자, 처남 크레온을 통해 얻은 신탁대로 선대 왕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밝혀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내려진 불행한 신탁, 즉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한다는 저주가 자신이 해결하려고 든 사건과 뒤얽혀 실현되었음이 드러난다. 소포클레스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근원적 질문을 담고 있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가 오빠의 장례를 두고 외삼촌 크레온과 대립하면서 생기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오빠인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법으로 금지하고 그 법을 어긴 안티고네를 돌무덤에 가둠으로써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지 않고 산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잘못을 저지른다. 그로 인해 안티고네와 그녀의 약혼자인 자신의 아들이 죽고 그 죽음을 슬퍼하며 아내마저 죽어 버리자 자신이 안티고네에게 행했던 대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홀로 이승에 남겨지게 된다.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 정치적 사고방식과 혈연적 사고방식 등 세계의 양 극단을 대표하는 두 인물의 극명한 대비로 인한 극적 긴장이 뛰어나다.

아이아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인 아이아스는 또 다른 영웅인 아킬레우스가 죽으면서 남긴 무구를 두고 벌인 투표에서 오뒷세우스에게 지게 되자 치욕 속에서 분노한다. 그러던 중 아테네 여신이 꾸민 덫에 걸려 들판의 짐승들을 오뒷세우스와 그 외 희랍 군사들로 착각해 밤새 도륙하다 정신을 차린 후 수치심에 자결한다. 아이아스의 동생 테우크로스가 그의 장례를 치르려 하자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군 사령관인 그의 형 아가멤논이 이를 반대하는데, 아이아스의 숙적이었던 오뒷세우스가 도리어 이들을 설득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돕는다. 독특하게 주인공이 이미 사건을 저지른 상황에서 극이 시작되는데, 불변을 원한 구식 영웅의 죽음과 그 앞에 남은 ‘이긴 자’들의 편협하고 초라한 진면모, 변화와 관용을 중시하는 또 다른 영웅의 부각이 순차적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덕목을 갖춘 인간 정신의 부활을 암시한다.

트라키스 여인들
엇갈릴 수밖에 없는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세계를 첨예하게 그린 작품으로, 지극히 여성적이고 우유부단한 여인이 남편의 사랑을 되찾으려 처음으로 내린 결정이 야기하는 엄청난 파국을 다루고 있다. 남편 헤라클레스가 이국에 종으로 끌려갔다가 그곳의 왕을 쓰러뜨리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데이아네이라는 남편이 먼저 보낸 포로들 가운데 이국의 공주였던 여인이 그가 고른 새 신부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독약을 사랑의 묘약으로 착각해 그의 옷에 묻혀 보내고, 그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끔찍한 고통에 휩싸이게 되며 사실을 알게 된 데이아네이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다.
기원전 책을 읽다니.
책을 읽으면서도 신기한 기분이다.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오이디푸스왕에 대한 강연을 보고 흥미가 생겼다.
엄청난 진실이 숨겨져 있는 내용이니만큼 극 중 대사에서 긴장감이 넘친다.
비밀이 숨겨져 있는 대사가 나올 때마다 짜릿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주변인물들을 수소문해나간다.
처음 사건의 단서를 주는 것은 처남인 크레온이다.
대화에서 크레온은 라이오스를 죽인 것은 도적들이라고, 다수의 손으로 그를 죽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이디푸스는 '그 도적은' 이라며 단수로 말을 받는다.
또한 선포할 때에도 오이디푸스는 범인이 다수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범인을 단수와 혼용하여 말한다.
이렇듯 오이디푸스의 입에서 나오는 복선은 더욱 이야기를 고조시킨다.
특히 경악스러운 복선은 이 대목이다.

36 그러니 나는 이것을 위해, 마치 내 아버지의 일인 양 싸워나갈 것이고, 그 살인을 저지른 자를 잡고자 찾으며 모든 곳을 뒤질 것이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를 만나고 놀라 침묵하며 돌아가겠다고 한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분노해 그를 비난하고 모욕적인 말을 한다.
화가난 테이레시아스도 저주의 말을 퍼붓는데, 사실 그 말은 이야기의 진실이자 복선이다.
테이레시아스의 '지금은 제대로 보지만 그때는 어둠만을 보게 될 그대를'이라는 대사는 진실을 알게 된 후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복선들이 너무 잔인해서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비극이 계속 쌓인다.

테이레시아스에게 범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부인인 이오카스테에게 라이오스에 대해 물어본다.
피살이 일어난 장소가 자신이 한 노인을 죽였던 장소와 일치하자 놀라 '그가 어떤 체격이었는지, 젊은 힘이 얼마나 절정에 다다라 있었는지를' 묻는다. 
이것은 자신이 죽인 노인이 라이오스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오카스테와 대화를 나누며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인임을 알게된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은 하나둘 내막을 눈치챈다.
오이디푸스보다 먼저 알아차린 사람들은 진실이 두려워 그 것을 파헤치려는 오이디푸스를 막는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에게 '이 사람이 누구에 대해 말했든 무슨 상관인가요? 신경쓰지 마세요. 공연한 소리를 쓸데없이 되새기려 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혈통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제발 그것을 추적하지 말라고 하는 간절함에 가슴이 졸아든다.
오이디푸스를 버린 하인과 대면할 때도 사자가 하인이 준 양자가 바로 오이디푸스라고 말하자 하인은 절규하듯 '파멸 속으로 꺼져 버려라!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라고 소리지른다.
이처럼 진실의 끔찍함에 주위 사람들이 격렬한 저항을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의지를 관철해 앞으로 나아간다.
오이디푸스가 상징하는 것은 자신이 파멸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임을 알 수 있다.
줄거리의 파괴력 때문에 오이디푸스가 단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만 대표되는 것이 아쉽다.

결국 모든 진실을 알게된 오이디푸스는 광란하며 부인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찾는다.
하지만 이미 올가미에 매달려 있는 그녀를 보고 그녀 옷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이것은 죽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복선이 회수되어 오이디푸스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크레온에게 불경한 자신을 이 땅에서 쫓아내길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로 딸들을 걱정해 그에게 부탁한다.
신의 저주같은 신탁을 받아 자신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다.
하지만 이런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의 자식들, 특히 오이디푸스가 걱정하는 딸들도 순탄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을 것이라는 것이 예상되어 오이디푸스가 더욱 안타깝다.
오이디푸스는 그동안 읽었던 모든 책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105 나를 얼른 이 땅 밖으로 이끌어 내 주시오.
 이끌어 내 주시오, 오, 친구들이여, 가장 저주받고 크게 파멸한 인간들 가운데서도 신들께 가장 미움 받는 나를.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자의 서사시가 아닌 수사극으로써 진행되어 긴장감을 주는 방식이 굉장히 훌륭했다.
대사가 가진 의미와 역할을 알게될 때마다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으나 한편으로는 연민이 싹텄다. 
그리고 마지막장의 삶의 다변성을 이야기하는 코로스의 대사가 주는 교훈에 소름이 끼쳤다.

116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비극이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싸우다 서로의 손에 한날 죽는다. 그 중 폴뤼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사위가 되어 테바이를 침공했기 때문에 외삼촌인 크레온이 장례를 금한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르고 크레온의 명령으로 돌무덤에 갇혀 자살한다.
동생 이스메네가 살아 남긴 했지만 홀로 살아 남은 자로서의 비극이 또 시작된 셈이다.
결국 크레온의 아들과 부인까지 죽은 것을 보면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안티고네'에서도 삶의 다변성을 이야기하는 대사가 눈에 띈다.

143 왕이시여, 필멸의 인간은 그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으리라 맹세할 수 없습니다.
 나중의 숙고가 처음 생각을 거짓으로 만드니까요.


'아이아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삶의 다변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이아스는 이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테네의 덫에 걸려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자가 하는 대사이기에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241 길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은 모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고, 또 드러난 것들을 숨기오.
그리하여 어떤 일도 예상 밖의 것이 아니며, 무서운 맹세도 굳고 굳은 가슴도 극복된다오.


각주를 읽다보면 좀 귀찮은 부분이 있다.
반복된 설명은 앞의 각주를 참고하라는 설명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라키스 여인들'에서 '헬리오스'에 대한 각주를 '「오이디푸스 왕」660행 각주 참고.'라고 적는다.
62페이지의 660행을 찾아가면 그 각주는 '태양신'이라 적혀 있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을 쓰는지 정말 모를일이다.
어차피 반복되는 각주는 이렇게 신에 대한 반복된 정보가 대부분이라서 각주의 길이도 짧기 때문이다.


'트라키스의 여인들'은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이야기다.
헤라클레스는 데이아네이라의 실수로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독자의 마음은 반대로 데이아네이라에게 연민이 가고 헤라클레스에게는 분노하게 된다.
데이아네이라의 마음은 선의로 가득하고, 헤라클레스의 마음은 이기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부인이 있음에도 이올레를 향한 욕망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 여인을 신부로 맞이하려 집으로 보낸다.
그럼에도 데이아네이라는 화를 내긴 커녕 여인에게는 친절을 베풀고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되찾으려 사랑의 묘약을 옷에 적셔 그에게 보낸다.
그런데 그 묘약이 독약이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악의도 없었으나 데이아네이라는 헤라클레스는 물론 아들 휠로스에게조차 분노와 혐오을 당한다.
심지어 휠로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설사 내가 죽을 때 네가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라는 말을 듣는데도 어머니만을 힐난한다.
결국 헤라클레스의 소식을 들은 데이아네이라는 자살을 하고 만다.
어머니에게 내뱉는 휠로스의 대사가 너무 잔인하다.
헤라클레스의 맹목적인 영웅화를 이해할 수 없다. 

343 가게 놔두시오. 떠나는 그녀를 바람이 밀어주기를, 내 눈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공연히 어머니라는 이름의 위엄을 지닐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전혀 어미답게 행동하지 않은 여자라면.
 그러니 평안히 가게 두세요. 내 아버지께 그녀가 주고 있는 즐거움을 그녀 자신도 차지하기를!


헤라클레스는 휠로스에게 이올레를 아내로 삼으라 말한다.
인간들 중 다른이가 내 옆구리 가까이에 누웠던 그녀를 네 대신 차지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이 것은 아들을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자신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후손을 통해서 여인을 가지려는 욕망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고 나서야 휠로스는 아버지의 말에 반대를 한다.
독자의 생각을 대변하는 대사다.

367 아아, 병든 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할 짓이 못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이를 또 누가 보고 견딜 수 있으랴?


어쨌든 헤라클레스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영웅의 안타까운 죽음임에도 그가 죽는 순간에 악이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후련하기까지 하다.
사실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작가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그가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인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을 이렇게까지 영웅성이 없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감상이 되는 것은 기원전 작가의 시각과 현시대를 사는 독자의 시각의 차이때문일까.
제목이 '트라키스 여인들'인 것도 의아하다.


고전은 어렵지만 작품해설이 있어 더 재미있기도 하다.
기원전 극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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