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멜론 슈가에서 / 미국의 송어낚시 보통날

최근에 구매한 책 중 가장 후회하는 책이며 좋은평은 한 줄도 적지 않을 것이니 작가의 팬이라면 읽지 않길 바랍니다.

워터멜론 슈가에서
책소개

1967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전 세계 문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은 <미국의 송어낚시>에 이어, 그 다음 해인 1968년 출간된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또 다른 작품. '워터멜론 슈가로 둘러싸인 가공의 마을, 아이디아뜨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화적인 이야기이자 파스토랄(전원생활이나 목가적인 정서를 주제로 한 시문학)'이다.

마치 목가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사회 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이 마을에는 도처에 강이 있고, 그 강에는 송어들이 살고 있다. 강에서는 죽은 사람들과 함께 도깨비불이 넣어진 유리관이 있어 언제나 빛을 낸다. 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거대한 식물들의 조상이 있으며, 사람들이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오두막이 있다.

구성의 독창성과 동화적 은유, 시적 표현들로 1960년대 수많은 독자들을 열광시킨 소설이다. 미국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고 매혹된 최승자 시인이 번역했고, <미국의 송어낚시>를 우리말로 옮겼던 김성곤 교수가 작품 해설을 썼다.


얼마 전 알라딘에서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발견했다.
예전 비밀독서단에서 소개가 되기도 했던 책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구매했다.
그게 첫번 째 실수인데, 요새 책장에서 다시 안 볼 책들을 골라 판매하며 새 책이 천원에 팔리는 걸 보니 판매가 천원이 안되는 책은 소장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읽자마자 팔아버리고 싶어졌으나 700원의 판매가를 보니 정말 손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한 제목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는 정말 달콤한 제목이 다인 소설이다.
세상에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이기적인 소설은 처음이었다.
이 소설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 소설은 iDEATH라는 곳에(사실 이 아이디아뜨라는 곳이 장소를 명명하는 것인가 조차 명확하지 않다.) 사는 주인공(사람도 아닌 어떤 존재, 아니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관념? 말그대로 어떤 무엇)과 그 곳에 사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안읽은 사람은 저 부연설명이 이해가 안될 것이다.
물론 책을 읽은 나도 이해가 안된다.

아이디아뜨라는 명칭은 작가가 만든 i+DEATH의 합성어이며 번역가는 그것을 트릭이라는 생각으로 idea+death의 합성어로 생각해 아이디아뜨라 명명한다. 여기서부터 이 소설의 문제가 시작된다.
인보일의 자살소동을 이해하기 위해 번역가는 아이데뜨라 표기 했어야 한다고 본다.
애초에 i를 소문자로 친절하게 적지 않았는가.
영문판으로 읽은 독자라면 작가의 의도든 트릭이든 iDEATH라는 단어를 아이데뜨라고 읽었을것이다.
독자는 거기에서 오는 관념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이 불확실한 이름의 아이디아뜨는 등장인물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장소라 칭할 수 없는 범위의 장소 혹은 인물들의 관념적인 어떤 곳을 말하기도 한다.
이 아이디아뜨에 상반되는 장소의 이름은 '잊혀진 작품들'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어떤 것을 눈치챈다.
이 것들이 의미하는 무엇이 있겠구나.

그리고 이세계의 중심인 워터멜론 슈가. 이 역시 설명할 수 없다.
이 것은 이 세계를 만드는 모든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이 모든 것이 워터멜론 슈가 안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워터멜론 슈가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워터멜론 슈가는 일곱가지가 있는데 이 것은 일곱 가지의 태양으로 만들어진다.
책 표지에서 이 소설을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마을에서 펼쳐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라고 표현한다.

이 설명이 이 책의 배경이며 인보일과 마가렛이 자살하는 사건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아주 불친절한 힌트를 주며 무엇인가 상징하는 듯한 동화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결국 실체가 없다.
인보일이 아이디아뜨를 보여주겠다며 자살을 하고, 마가렛이 끝내 목을 메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이해하려 해보아도 그 뿐이다. 이야기에 실체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것이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냐고????

그나마 인보일이 독자에게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말해주지. 이곳에서 썩은 냄새가 나. 여긴 전혀 아이디아뜨가 아니야. 이건 당신의 상상이 꾸며낸 허구야. 여기 있는 너희들 모두가 이 병신 같은 아이디아뜨에서 병신 같은 짓들을 하고 있는 한 무더기의 병신들이란 말이야."
이 대사를 보고 난 이 소설에 실체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알 것같고, 이해할 것 같은 것이다. 그런 기대를 자꾸 품게 한다.
인보일이 아이디아뜨를 보여준다며 자신의 엄지손가락과 코와 귀를 자르고, 아이디아뜨의 진정한 주인은 살육을 저지르는 호랑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iDEATH에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그래서 뭐??????
호랑이가 뭘 의미하길래 주인공이 그 과거에 집착하는데?
거실에서 부엌 사이 통로가 어떻게 강 하구로 이어지는 건데?
나를 비워야 비치는 거울이 보여주는 게 뭘 의미하는건데?

더욱이 작가가 독자에게 주인공을 설명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당신이 오래전에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저면 아주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아니면 어떤 이들이 당신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했다. 당신은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이 한 것이 틀렸다고 말했다. '잘못해서 미안합니다.' 하고서, 당신은 다시 다른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p.17)

주인공이 사람이긴 한걸까.
등장인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긴 할까?

마가렛이 자살하고 폴린이 등불을 든 처녀라는 것이 밝혀지고 악기를 연주하길 기다리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이 나면서 난 끝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소설속 인물에 대화가 어이없다.

  "넌 어째서 그녀가 자살했다고 생각해?"
 프레드가 말했다.
 "왜 그녀가 그런 짓을 해야 하지? 그녀는 너무도 젊은데. 너무도 젊어."
 "모르겠어." 내가 말했다.
 "그녀가 어째서 자살을 했는지 난 모르겠어."
(p.201)

나도 정말 모르겠다.
난 결국 이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허황되고 허세 가득한 표현력과 스토리를 아름답고 슬프다고 포장하는 것에 넘어가지 말자고.
하나도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냥 잔혹동화라고 했으면 재미야 있었겠지.
이 소설은 실체도 없고 알맹이도 없다.
이런 걸 역작이라고 하는 미국 문학이 불쌍할 정도다.

그런데 '미국의 송어낚시'가 그렇게 칭송받는 소설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워터멜론 슈가에서도 나오는 송어부화장을 따라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어보기로 했다.
그럼 이 책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내 두번째 실수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나마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본게 다행이다.
최근 에세이나 교양서적을 읽으면서 여러권의 책을 동시에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도 완독은 한다. 특히 소설은 아무리 재미가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런데 결국 반을 읽고 포기했다.
처음 몇장이 정말 고비였다. 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반만 읽자. 그럼 뭐가 보이겠지 싶어 꾸역꾸역 절반까지 읽고 이건 시간낭비임을 확신했다.

이건 더욱 알맹이가 없다.
이 책은 소설이라고 해선 안된다.
스토리가 없고 스토리텔링은 처참하다.
이런 건 소설이 아니다.

일단 '미국의 송어낚시'는 이해는 된다.
책에 내용이 온통 풍자로만 가득해서 뒤에 설명서가 따로 있으니까.
단, 설명서 없이는 책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도 내용이 처참할 뿐이다.
의미없는 책 제목의 나열, 날짜의 나열. 요리방법과 나름 그 속의 작은 이야기가 몇번 나오긴 한다. 재미는 없지만.
작가의 의도를 알아보려 책을 검색하기도 하고 이런 방식을 취향차이라고 생각해보려고도 했으나 이건 정말 답이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 좋다.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이란게 이렇게 멍청한 거였나.
개성과 자율성, 다양성이라는 말로 이렇게 수준낮은 글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예술은 처참한 수준으로 떨어진 거다. 
간결하다 포장했지만 간결함이야 말로 꽉찬 것이다. 
이 책의 글은 간결하나 내용이 없다.
어휘력은 물론 스토리텔링도 뒤떨어진다.
그게 컨셉이라면 얼마나 허세 가득한 컨셉인가.
단지 치기 어린 시절의 작가의 불평불만이 가득한 글일 뿐이다.
비판도 아니고 풍자라 표현하기도 아까울 비꼬기만 가득한 글일 뿐이다.
스토리가 없다.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이건 소설이 아니다.
단지 그 시절 반체제 정신과 반문화 정신이 가득한 그 반항적인 시절의 젊은 사람들에게나 통했을 책이다.
왜 그 시대 20대들의 성서라고 했는지 책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시대의 치기 어린 세대들에게 통하는 책이라는 뜻이었다는 걸.

작가는 이 소설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에서 특히 그렇지만, 소설에서도 과도한 설명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제 작품 속에 지혜보다는 '위트'를, 본질의 구명보다는 '과정'을 더 중요시합니다. "미국의 송어낚시"도 끝없이 계속되는 과정일 뿐 본질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 소설에서는 도덕성이나 교훈적인 요소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도덕성이나 교훈이 결코 문학과 예술의 명제는 아니니까요.

나는 위트보다 지혜가, 과정보다 본질이 중요하다.
작가이면서 우선순위가 나쁘다.
본질도 없는 소설로 독자에게 뭘 얼마나 보여주겠다는 걸까.
작가의 의도 자체가 허황되서 놀랐다. 그걸 포장도 잘 못하는데에 더 놀랐고.
반문화 소설을 쓰면서 도덕성과 교훈적인 요소를 문학과 예술에 결부시켜 변명하는 것도 우습다.

이 소설은 그냥 그 시대 미국의 시대정신 그 자체이며 그게 다이다.
예술로서 문학으로서 기대는 전혀 안하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소설은 어느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진짜 인간적으로 워터멜론 슈가에서 이해한 사람만 추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