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주도한 기 드 모파상의 대표작이자 첫 번째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1883년 출간되어 문단과 대중 모두의 호평을 받은 『여자의 일생』은 한 선량한 귀족 여인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인생의 굴곡을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 낸 수작이다.스탕달과 프루스트를 비롯한 프랑스 문학사의 주요 작품을 연구한 문학 박사이자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명예 교수인 역자 이동렬은 원전주의에 입각한 이번 새 번역에서 불필요한 의역을절제한 것은 물론, 자연주의 계열 작가로 국한되면서 가려졌던 모파상의 섬세하며 서정적인 문장의 미감을 온전히 살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 『여자의 일생』은 인간 삶을 관조하는 모파상 문학의 깊은 주제 의식과 더불어 모파상 문학에 담긴 현대적 감수성과 미학적 완결성을 새로이 깨닫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한 여인의 굴곡진 인생을 통해 인간 삶의 진실을 통찰한 소설모파상이 서른세 살 때 쓴 첫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은 노르망디 시골을 배경으로 꿈 많고선량한 한 귀족 여인의 일대기를 담은 소설로, 오늘날 모파상의 소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작가가 아버지 어머니의 별거와 이혼 등 평탄하지 못한 부부 관계를 바라보며 모티프를 얻은 이 작품에는 꿈 많던 한 소녀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좌절과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설은 잔느가 수녀원 기숙 학교에서 나오는 1819년 5월을 시작점으로 삼십여 년을 다루는데 그 기간은 칠월 혁명이나 국가 체제 변화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는 무관하며, 공간적 배경은 노르망디 시골이다. 모파상은 현실 감각 있고 노련한 인물 대신 활동 공간과 만나는 사람들이 제한되고, 타인과 세계에 대해 환상과 기대만이가득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그녀가 겪는 인생 우여곡절의 비극을 더욱 강조한다.수도원 학교를 갓 졸업해 감미로운 사랑을 고대하는 잔느 앞에 외모가 수려한 귀족 청년 쥘리앵이 나타난다. 둘은 순조롭게 결혼하여 푀플 성에 자리를 잡지만 쥘리앵은 점차 잔느를 무심하고 냉담하게 대한다. 잔느는 인색하며 천박한 남편의 실체를 깨닫고 성에서 고적한 일상을보내던 중, 이웃인 백작 부인과 가까운 친구가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쥘리앵과 백작 부인의불륜을 목격한 잔느는 외아들인 폴에게 남은 애정 전부를 쏟는다.순진하며 방어 능력 없는 한 여성이 영락해 가는 이 이야기는 모파상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시종일관 염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이 작품이 발간 당시 3만부 가까이 팔릴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장르로 각색되며 사랑받는 이유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독자를 절망의 심연으로 빠뜨리지 않는 무게중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혹심한 시련을 몇 차례 겪어도 잔느는 다시금 기운을 차리며, 새로운 희망과 애정의 대상을 찾는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라는 작품 말미의 대사가 말해 주듯 『여자의 일생』에는 인간 삶을 환상이나 과장 없이 바라보는 작가의 성숙한 시선이 담겨 있다. 단순한 애정이나 염오를 넘어, 여러 사건을 겪으며 부딪히고 변화하는 등장인물의 감정선은 인간에 대한 모파상의 날카롭고도 따스한 통찰을 보여 준다.
간결한 문체와 아름다운 풍경 묘사로 소설 미학의 완결을 이룬 작품
모파상은 장편보다는 단편 소설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다. 그러나 작가가 육 년간 쓴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은 단편 소설의 미덕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읽는 본질적인 재미를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여자의 일생』의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상황 묘사와 장황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문장은 자연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에는 예상 외로 서정적이며 현대적인 감수성이 담겨 있다. 『여자의 일생』은 ‘오직 문체의 힘만으로 지탱되는 무(無)에 관한 책을 쓴다’는 플로베르의 이상을 그의 제자 모파상이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이러한 감수성은 특히 모파상의 고향이자 작품 배경인 노르망디 풍경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노르망디의 산과 들, 바다는 인물 심정에 따라 다채롭게 그려지며 작품을 입체화한다.
쥘리앵과 처음으로 관능적 애정을 확인하게 된 잔느에게 펼쳐진 세계는 역동적이며 신선한 것이다. 기암괴석의 다채로운 형태와 웅장한 규모는 잔느가 기대하는 결혼 생활처럼 오묘하며 생경한 미지의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결혼에 환멸을 느끼고 난 뒤 그녀가 바라보는 노르망디풍경은 음울하며 정적이고 죽음에 가깝게 묘사된다. 마치 인상주의 회화와 같이 포착된 순간의 풍경들은 주인공 심리를 반영하며 그녀 운명을 예고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작품의 서정적인분위기를 환기함으로써 『여자의 일생』의 미학을 완성한다. 모파상 특유의 서정적 문체와 섬세한 문장을 살린 번역 스탕달과 프루스트를 비롯, 프랑스 문학사에 있어 주요 작품을 연구한 문학 박사이자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명예 교수인 역자 이동렬은 원전주의에 입각한 이번 새 번역에서 불필요한 의역을 절제하고, 단어의 적확한 의미와 장면 분위기를 최대한 살렸다. 역자는 “스탕달,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같은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소설가들에 비해서 모파상의 문학사적 비중은 약간 낮게 취급되어 온”(355쪽, 「작품 해설」에서) 게 사실이나 『여자의 일생』은 “19세기 어떤 소설들보다도 소설적 재미와 소설 미학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으며, 일찍부터 프루스트를 예고하는 현대적 감수성을 배태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적 기질을 잘 구현한 작품”(356쪽, 「작품 해 설」에서)이라고 말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 『여자의 일생』은 인간 삶을 관조하는 모파상의 주제 의식과 함께 자연주의 계열 작가로 국한되면서 가려졌던 모파상 문학의 섬세하며 서정적인 표현을 음미하고 모파상 문학에 담긴 현대적 감수성과 미학적 완결성을 새로이 깨닫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예스24 제공]간결한 문체와 아름다운 풍경 묘사로 소설 미학의 완결을 이룬 작품
모파상은 장편보다는 단편 소설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다. 그러나 작가가 육 년간 쓴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은 단편 소설의 미덕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읽는 본질적인 재미를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여자의 일생』의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상황 묘사와 장황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문장은 자연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에는 예상 외로 서정적이며 현대적인 감수성이 담겨 있다. 『여자의 일생』은 ‘오직 문체의 힘만으로 지탱되는 무(無)에 관한 책을 쓴다’는 플로베르의 이상을 그의 제자 모파상이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이러한 감수성은 특히 모파상의 고향이자 작품 배경인 노르망디 풍경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노르망디의 산과 들, 바다는 인물 심정에 따라 다채롭게 그려지며 작품을 입체화한다.
쥘리앵과 처음으로 관능적 애정을 확인하게 된 잔느에게 펼쳐진 세계는 역동적이며 신선한 것이다. 기암괴석의 다채로운 형태와 웅장한 규모는 잔느가 기대하는 결혼 생활처럼 오묘하며 생경한 미지의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결혼에 환멸을 느끼고 난 뒤 그녀가 바라보는 노르망디풍경은 음울하며 정적이고 죽음에 가깝게 묘사된다. 마치 인상주의 회화와 같이 포착된 순간의 풍경들은 주인공 심리를 반영하며 그녀 운명을 예고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작품의 서정적인분위기를 환기함으로써 『여자의 일생』의 미학을 완성한다. 모파상 특유의 서정적 문체와 섬세한 문장을 살린 번역 스탕달과 프루스트를 비롯, 프랑스 문학사에 있어 주요 작품을 연구한 문학 박사이자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명예 교수인 역자 이동렬은 원전주의에 입각한 이번 새 번역에서 불필요한 의역을 절제하고, 단어의 적확한 의미와 장면 분위기를 최대한 살렸다. 역자는 “스탕달,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같은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소설가들에 비해서 모파상의 문학사적 비중은 약간 낮게 취급되어 온”(355쪽, 「작품 해설」에서) 게 사실이나 『여자의 일생』은 “19세기 어떤 소설들보다도 소설적 재미와 소설 미학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으며, 일찍부터 프루스트를 예고하는 현대적 감수성을 배태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적 기질을 잘 구현한 작품”(356쪽, 「작품 해 설」에서)이라고 말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 『여자의 일생』은 인간 삶을 관조하는 모파상의 주제 의식과 함께 자연주의 계열 작가로 국한되면서 가려졌던 모파상 문학의 섬세하며 서정적인 표현을 음미하고 모파상 문학에 담긴 현대적 감수성과 미학적 완결성을 새로이 깨닫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개별적 사건으로 보면 요즘 시대에는 크게 특별하지 않은 흔한 막장 사건들이지만 한 여자의 일생으로, 모파상의 문체로 읽으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풍부한 자연 묘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실적인 묘사가 이렇게 감성적일 수 있다니.
25 태양이 사라진 이 정적 속으로, 대지의 모든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아래쪽 창문 주위로 기어오르는 재스민이 강한 숨결을 계속 발산하면서 갓 피어나는 나뭇잎의 좀 더 가벼운 냄새와 뒤섞이고 있었다. 이따금 둔탁한 돌풍이 불고 지나가며 소금기 머금은 대기와, 땀 냄새처럼 끈끈한 강한 해초 냄새를 실어 왔다.
'여자의 일생'은 일본에서 번역한 제목으로 원제는 '어떤 일생'으로 번역된다.
'여자의 일생'으로 유명한 작품이므로 그대로 차용했다고 하는데 민음사에서 '어떤 일생'으로 나왔다면 제대로 된 제목을 찾을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 아쉽다.
모파상의 의도에도 안 맞고 제목에서 신파적인 느낌이 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에게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남녀관계의 통찰력이 대단하다.
여자의 마음은 또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내가 읽은 모든 글을 통틀어서 여자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했다.
남녀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글로 그것도 훌륭하게 써낸다.
63 그녀는 손가락에 경련을 느꼈던가?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마음이 혈관을 타고 옆 남자의 심장에까지 줄달음질쳐 갔는가? 그 남자도 깨닫고, 알아차리고, 그녀처럼 일종의 사랑의 도취에 휩쓸렸는가? 아니면 단지 그 사람은 경험상 어떤 여자도 자기에게는 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뿐인가?
남녀관계의 통찰력은 너무 정확해서 웃음 날 정도다.
51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그들의 눈길을 자주 마주치게 했다. 마치 친화력이 그들에게 예고해 주기라도 한 듯 그들은 동시에 눈을 쳐들곤 했다. 왜냐하면 총각이 못생기지 않고 처녀가 예쁠 경우, 두 젊은이들 사이에 신속하게 생겨나게 마련인 미묘하고도 모호한 다정함이 이미 그들 사이에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녀원에서 나온 잔느는 사랑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있는 여인이다.
그런 그녀가 키가 크고 우아하며 아름답고 사교적인 쥘리앵에게 빠지지 않는다는 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쥘리앵의 외모를 이렇게 표현한다.
'남자들에게는 대개 불쾌감을 주지만, 여자들에게는 이상적으로 보이는 그런 번듯한 외모였다.'
이렇게 현대적인 표현으로 공감시키다니.
잔느 가족은 쥘리앵과 함께 에트르타로 소풍을 나간다.
에트르타의 바위를 모파상이 묘사한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서 나온다.
지금도 그 바위는 코끼리 바위로 불린다.
50 그리고 앞쪽 저 멀리에는 괴상한 바위가 솟아 있었는데, 중간에 구멍이 훤히 뚫린 그 둥그스름한 바위는 물속에 코를 처박은 거대한 코끼리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두 사람은 단둘이 산책도 나가고 많은 대화를 한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는 여행 가고 싶은 나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황혼과 함께 침묵에 잠긴다.
이 장면에서 모파상이 두 사람에 빗대어 자연을 묘사하고 연인으로 석양을 설명하는 방법이 기가 막히다.
57 바람의 마지막 숨결도 잦아들었다. 물결의 모든 주름이 평평해졌다. 그리고 요동도 않는 돛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한한 침잠이 공간을 마비시키고, 원소들이 조우하는 주위에 침묵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괴물 같은 약혼녀인 바다는 그 반짝이는 유연한 배(腹)를 하늘 아래 길게 늘어뜨리고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불의 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인은 포용하려는 욕망 때문인 듯 붉게 타오르며 하강을 서둘렀다. 애인은 마침내 약혼녀에 합류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약혼녀가 애인을 삼켜 갔다.
가까워진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수녀원에서 순결하게 자란 잔느는 첫날밤 첫 번째 위기를 맞는다.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쥘리앵은 다정하게 다가가지만 결국 난폭한 애무로 잔느를 상처입힌다.
이 대목까진 쥘리앵을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잔느만큼 배신감이 컸다.
모파상 경험치가 보인다.
85 쥘리앵은 이 싸움에 얼마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리고 꿈속에서 자라난 순결한 영혼의 미묘한 수치심과 무한한 섬세함을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유연한 자제력과 얼마나 능란한 사랑의 기교가 필요한지 어렴풋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잔느의 손을 잡아 키스하고, 마치 제단 앞에서처럼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숨결보다 더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를 사랑해 주겠소?" 갑자기 마음이 놓인 잔느가 레이스 장식으로 덮인 머리를 베개 위에서 쳐들고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벌써 사랑하고 있는걸요."
신혼여행을 떠난 잔느가 욕망에 눈을 뜨는 걸 보고 앞으로 바람을 피우는 내용으로 전개되려나 했지만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차가워진 쥘리앵이 자신과 함께 자란 젖동생이자 하녀인 로잘리와 바람을 피운다.
로잘리가 잔느의 침대를 정리하던 중 판자에 기댄 채 출산하는 모습, 그를 본 쥘리앵의 격렬한 반응은 가히 충격적이다.
결국 잔느는 쥘리앵과 로잘리의 불륜을 목격하고 절망해서 자살하려다 눈 속에 쓰러지고 만다.
두 사람의 불륜이 밝혀지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를 용서한다.
남작님도 난봉을 피우신 적이 있지 않냐고 설득하는 신부의 말에 남작도, 부인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올곧고 도덕적인 잔느에게는 이 사건이 큰 슬픔이고 절망이었지만 부도덕한 그들은 아무도 그녀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지 못한다.
잔느는 곧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사랑에 환멸을 느껴 오로지 아기 생각만 하며 살아간다.
잔느는 의존적이며 고통을 회피하는 인물이다.
자기 생각을 누구에게도 분명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자기연민에 빠져 상황을 직시하지 않는다.
결혼 후 차가워진 쥘리앵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바람난 두 사람에게 확실하게 대응했다면, 용서한 가족들에게 반발할 수 있었다면 이후에 일어날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운명이 그녀에게 유독 가혹했지만 단 한 번도 맞서본 적 없는 그녀는 그 불행을 온전히 감당해야만 했다.
142 잔느는 구차한 설명이나 논쟁이나 말다툼을 피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노랑이짓이 새롭게 나타날 때마다 그녀는 바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그런 행위가 천하고 추하게 보였다.
쥘리앵은 새로 사귄 백작 부인과 다시 불륜을 한다.
잔느는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지만 도깨비 같은 백작은 이를 알고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오두막을 절벽으로 밀어 둘을 죽인다.
이 사건으로 잔느는 둘째를 유산하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중학교에 간 아이는 창녀에게 빠져 여기저기에 빚을 지고 계속 돈을 요구한다. 청년이 되어서도 계속 이를 반복해 결국 가세를 기울게 만든다.
끝내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남은 잔느에게 로잘리가 찾아와 그녀를 돕는다.
잔느는 평생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회한에 빠진 그녀의 모습은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을 지경이다.
결국 노년에는 악착같은 불운에 쫓겨 항상 일을 망칠 것으로 생각해서 아무리 단순한 일이라도 실행하기 전에 며칠씩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들을 돕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녀가 보이는 유일한 집념이지만 이 역시 불행을 자초할 뿐이다.
창녀와 결혼한 아들은 부인이 죽자 로잘리를 통해 아기를 먼저 보내고 장례가 끝나고 돌아가겠다고 한다.
과연 그가 잔느에게 돌아왔을까?
아들만이 유일한 행복인 잔느에게 자식을 잘못 키운 대가가 너무 크다.
339 잔느는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았다. 수녀원을 나온 다음 날, 즉 루앙을 떠나던 날 아침에 자기 손으로 지웠던 날짜들이 거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천천히 흐르는 서글픈 눈물, 자기 앞 테이블 위에 펼쳐진 비참한 생애를 마주하고 흘리는 노파의 가련한 눈물이었다.
소설에 "나우 주는 편이 낫죠."라는 문장이 나온다.
당연히 오자인 줄 알았는데 '조금 많이'라는 뜻의 '나우'라는 부사가 있는 것이다.
아직 생전 처음 보는 부사가 있을 줄은...
초반에는 단지 매력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잔인하다.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게 모파상답다는 생각도 든다.
일생을 이렇게 그린다는 게 염세주의 이상의 사디즘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페시미스트의 끝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