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예뻐지는 수필 보통날

목차

별 하나의 위안 |정채봉|
가족 사진 |함민복|
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곽재구|
뒷모습 |주자청|허세욱|
주소 유감 |장석남|
가장 삶의 모습에 가까운 하루 |최윤|
진홍색 입술 연지 |서영은|
일 포스티노 |안도현|
내 삶의 출구 |김미라|
그를 보면 마음이 환해진다 |신대철|
어머니 |김재진|
나무 심는 사람 곽탁타 이야기 |유종원|손광성|
바다|마르셀 프루스트 |김병욱|
세상에, 이런 일이! |황인숙|
분노의 눈물 |조지 기싱|이창배|
왼쪽 여자 |양귀자|
그대는 지금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가 |원재훈|
내가 좋아하는 것들 |김용택|
J는 누구인가 |이향아|
내 마음의 고향 |오정희|
큰 정(情)보다 잔정이 |유안진|
내일의 집 |최인호|
고독을 위한 의자 |이해인|

[인터파크 도서 제공]


자극적인 모든 것들에 마음이 시달리던 시기 중고서점을 구경하다 수필집을 한 권 구매했다.
유명작가들의 글이라 나쁘진 않겠다는 신뢰감과 제목에서 오는 평화로운 기대감으로.
틴케이스에서 사탕을 하나씩 꺼내 먹듯 마음이 지칠 때마다 한 편씩 꺼내 읽었다.
맞아, 난 원래 드라마보다 다큐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실 제목과 표지가 이 책의 가장 큰 장벽이다.
아무래도 2003년에 나온 책이다 보니 촌스럽기 그지없다.
심지어 커플책이라니. 커플책???
이 촌스러움을 이겨내고 책을 펴면 마음이 예뻐지는 수필을 만날 수 있다.
정말 마음이 예뻐지는 수필이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중국의 시인이자 산문작가인 주자청의 '뒷모습'과 신대철 시인의 '그를 보면 마음이 환해진다'이다.
특히 '뒷모습'을 읽으며 그동안 이렇게 작품성 있는 수필을 본 적이 있나 싶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수필에서 평화로운 일상 이야기로 치유를 받았지만 '뒷모습'은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이다.
도대체 이 중국 작가는 누군가 찾아봤더니 마오쩌둥이 '중국 민족의 기개를 드높인 작가'라고 칭송했단다.
여기서 왜 모택동이? 모택동이 작가를 칭찬할 수도 있는 건가?

'뒷모습'은 다 큰 아들을 기차역까지 배웅하며 뚱뚱한 몸으로 힘들게 철로를 건너 아들에게 귤을 사다 주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그린 글이다.
뚱뚱한 몸으로 홈을 기어 올라가고 기우뚱거리며 철도를 건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화자는 눈물을 흘린다.
가난한 아버지가 아들의 상경길에 챙겨 보내려고 귤을 사 오는 그 부단한 움직임에 슬퍼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을까.
그 애처로움을 진실하게 표현한 좋은 글이다.
짧은 명수필이라 그런지 검색하면 쉽게 전문을 읽을 수 있다.


32 내가 다시 바깥쪽으로 눈길을 멍하니 돌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빨간 귤을 보듬고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도를 다시 건널 때 이번에는 귤을 땅에다 놓더니만 먼저 서서히 기어내려서는 다시 그 귤을 보듬고 뚱그적거리고 오는 것이다. 이쪽으로 겨우 기어오르셨을 때 나는 얼른 가서 부축해 드렸다. 같이 찻간에 올라 귤을 내 오버 위로 와르르 쏟았다. 아버지는 흙 묻은 옷을 털더니만 한숨 놓는 말소리로 "나 간다. 도착하는 즉시 편지하렴." 하셨다. 승강구를 뛰어내려 몇 발을 옮기더니만 또 뒤돌아보며, "들어가라, 네 자리 살피렴!" 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고가는 인파 속에 파묻히자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자 눈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내렸다.


신대철 시인의 '그를 보면 마음이 환해진다'는 시인이 칠갑산에 있는 동안 고통 속에서 만난 친구 박재석과의 이야기다.
삶의 의욕도 없어지고 하루하루를 어렵게 견디고 있던 시인은 친구를 만나 정신적인 균형을 찾게 된다.
그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의 초기 시편들은 모두 그때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다스렸던 삶의 고통과 기쁨의 기록이라고 밝힌다.
그저 시인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글을 읽는 것만으로 나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정말 다행이다.


69 우리는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고 속내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감을 얻었고 그것으로 족했다. 그는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저수지를 도는 것으로 마음을 풀었고, 나는 칠갑산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면 그가 있는 곳까지 산길 사십 리 길을 달려갔다. 어두운 충동을 다 가라앉힌 뒤에 뒷산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칠 때의 황홀함이란! 사십 리 길을 달려가는 동안 내 어두운 마음은 다 풀려 그와 만날 때는 언제나 밝은 이야기만 하게 되었고 점차 주위의 작은 변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사람보다는 풀이나 나무 이름을 더 기억하게 만들어 자연을 통해 스스로 내 감정의 기복을 다스릴 수 있게 한 것이리라.


이 책 때문에 요즘엔 또 수필집만 열심히 읽고 있다.
최근엔 동물이나 역사 다큐만 봤는데, 휴먼다큐도 다시 찾아본다.
오랜만에 사람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