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보통날

책소개

불교계 대표 잡지 월간 「불광」에 연재되었다. 연재 당시 독자들의 절대적인 호응은 물론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론과 실천, 교리와 수행이 하나가 된, 그야말로 몸으로 체득한 불교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또 안개 속의 섬처럼 닿을 듯 말 듯한 ‘무아, 연기, 공, 자성, 업, 마음, 유식, 윤회, 열반, 해탈’ 등의 불교 사상을 우리의 일상적 삶에 대입해 명확하게 풀어냈다.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잘 알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 삶을 살아서 부작용 없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이 책이 인문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읽는 순간 ‘앎’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내 삶에 적용하여 자신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진단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계발서’이기도 하다. 삶을 이롭게 이끄는 힘을 자신 안에서 찾게 만드는 책을 진정한 인문서라고 할 때, 이 책은 우리 시대 새로운 명저이자 미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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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라 할 수 있는 사상은 연기緣起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기의 대승불교적 전개가 공空과 유식唯識 사상이다. 연기·공·유식을 형해만 남은 죽은 사상이 아니라 자기 몸속에서 펄펄 살아 숨 쉬게 하여, 연기·공·유식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선禪이다.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책이다.
불교의 교리를 처음 접하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일상적인 실례를 통해 설명하여 이해도를 높였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불교계 잡지인 「불광」에 연재된 글이라 그런지 설명이 매우 친절하다.
교리의 모든 내용을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난 중생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점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연기緣起가 진리다. 불교 교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며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다. 
연기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생겨나다"를 뜻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날 만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연기'에 함축된 의미는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함께 변하고 소멸한다'이다.
'왜 무상한가?'에 대한 답을 굳이 찾는다면 모든 것은 연기하기 때문이다. 조건이 지속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무상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연기한 것이므로 고정된 모습이 없다. 우리의 본래 모습도 이와 같아서 그 어떤 처지나 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과 같다.
우주의 만물은 한 몸인 관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연기의 세계인 것이다.
너와 나는 한 몸이고, 우주와 나는 한 몸이다. 우주가 곧 나고 내가 곧 우주다.

공空사상과 유식唯識사상은 모든 대승불교 교리가 기본으로 삼고 있는,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시조인 용수는 모든 것은 자성이 없는 공이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 생겨날 뿐인 연기가 성립한다고 통찰했다. 
즉 연기란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하며, 무자성인 것이 곧 공이라고 했다. 
연기=무자성=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공空'은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바로 자성自性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은 모든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무자성無自性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자성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말한다.
열반도 공이고, 윤회도 공이다. 열반이 곧 윤회요, 윤회가 곧 열반이다.


106 '일체개공一切皆空', 모든 것은 공이다. 비난도 공이다. 비난은 비난이라는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쉽게 말하면, 비난은 비난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석가모니 가까이 날아간 화살이 꽃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모든 것은 공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부파불교(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완전한 열반은 무성한 이 세상을 괴로움으로 보고 역겹도록 싫어하여 완전히 떠나버리는 것이다. 육신조차 없어져 이 세상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 유부의 이상이었다. 
내 종교가 무색하게도 나와 생각이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 이는 대승불교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하니 대승불교 수행자가 쓴 책을 읽는 독자로서 이런 생각 자체가 옳지 않은 것인가 하는 번뇌가 생겼다.
반면, 대승불교의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은 모든 번뇌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세계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는 열반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이 살아가는 삶이다.
불교 또한 성인의 자비로 중생이 구원받는 종교임에 다를 바 없구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는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는 말이다. 이 구절이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오온이다'가 된다. 
여기서 오온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은 대사일번(大死一番), 즉 한번 내가 크게 죽는 길이다. 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죽는 것에 의해 도리어 모든 것이 참된 진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을 선에서는 절후소생(切後蘇生)이라 한다. 공즉시색은 절후소생에 해당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탐욕과 목적부터 백지화되어야 '색즉시공'은 시작된다. 자신의 탐욕과 목적은 그대로 두고 도리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상대나 관습을 부정하려고 '색즉시공'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색즉시공'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린 태도다.
너무 놀랐다. 내가 색즉시공의 설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을 꿰뚫어 보고 있어서.
중생의 생각이 손바닥 안인가 보다. 깨달은 사람은 다르다.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分別에서 생겨나고, 분별은 희론戱論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희론이란 '말로 대상을 개념화하고 그에 대해 집착하는 것' 또는 '오류를 야기하는 말이나 개념 그 자체'를 가리킨다.
희론을 설명하는 예시로 저자는 실어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로웠다.
언어학자는 실어증 환자에게 '짙은 빨강', '옅은 빨강', '짙은 파랑', '옅은 파랑'의 카드 4장을 분류해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분류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4장의 카드 모두가 서로 다른 색깔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빨강'과 '파랑', '짙다',와 '옅다'와 같은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분류를 할 수 없었다. 정상인은 '빨강'과 '파랑'이라는 말에 의존하기에 분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와 실어증 환자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불교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갈애(渴愛)와 무명(無明)에 있다고 본다. 갈애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말하고, 무명은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을 뜻한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탐(貪, 탐욕)·진(瞋, 화)·치(痴, 어리석음) 3독이다.
탐진치, 즉 갈애와 무명을 바탕으로 한 행동과 말과 생각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악업이다.
사바세계는 '참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은 괴로움 속에서 이를 참고 살아가야 하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괴로움이 영원히 소멸된 상태가 곧 열반이다.
갈애를 있는 그대로 만날 때 갈애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가만히 대면하고 있으면 마음은 멈추고 고요해진다고 한다. 욕망을 마주할 때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나의 심리적·인식적 사건과 그에 대한 반응들에 의해 형성되는 시간을 '유위有爲의 시간'이라고 명명한다. 
'유위의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생각·느낌·판단·지식·가치관 등이 진리를 보는 데 장애가 되는 상들이다. 이런 상들에서 자유로운 눈이 진리를 꿰뚫는 지혜의 눈이다.
유위의 시간이 없는 자는 마음에 아무런 앙금이 없으니 눈앞에 '있는 그대로'보고 듣는다.
석가모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진리가 보인다고 했다.
분노와 질투가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비난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직시하는 것이다.


221 이렇게 순간순간을 사는 그의 마음은 확 트인 허공과 같다. 허공은 새가 아무리 지나가도 그 흔적이 남지 않으며, 천둥과 번개가 무수히 내리쳐도 멍들지 않는다. 허공과 같은 그의 마음에는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지옥도 없고 낙원도 없으며, 모자라는 것도 없고 넘치는 것도 없다. 이 순간이 모든 것이며, 이 순간은 이 순간으로 완결된다.


불교에서는 선을 유류선有漏善과 무루선無漏善으로 나누기도 한다.
'유루선'이란 번뇌가 묻어있는 선을 말하고, '무루선'이란 번뇌가 전혀 없는 완벽한 선을 말한다.
기복불교의 기도는 유루선에 가깝다.
저자는 기복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불교의 힌두화로 생겨난 기복불교, 번뇌가 끼어 있으나 부정할 수 없는 선인 유루선은 마치 천주교의 연옥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종교가 당대의 시대상에 맞게 변화하는 것은 세속적인 걸까, 자비로운 걸까.
그러면 세속적인 삶을 사는 중생을 맞으려 종교가 세속화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이럴 때 종교는 전통문화로 보이기도 한다. 시대에 맞춰 개량되는 모습이 말이다.(이건 너무 불경스러운가?)

유식唯識이란 '모든 것은 마음의 나타남, 즉 마음의 현현顯現일 뿐'이라는 뜻이다.
유식의 8식 중 여타의 마음과는 별도로 존재하면서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선천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는 마음이 바로 제7말나식末那識이다. 
말나식의 자아 집착 작용은 말나식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6식 모두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말나식을 염오의染汚意라고 부르는 것은 탁한 물감이 연못 전체를 물들이듯이 6식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말나식의 작용이 멈춰, 번뇌의 때가 전혀 끼지 않은 무루선無漏善을 행해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자의식 그 자체를 번뇌의 씨앗이며 어리석음, 아집, 교만 등으로 보고 오염과 암으로까지 표현하는 것에 놀랐다.
무아가 옳은 것이므로 자아의식이 이토록 비판받는 것이다. 
중생인 나는 정말 모르겠다. 번뇌가 괴롭긴 한데, 지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자의식이 만든 번뇌라면 그게 나쁜 건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불교 관련 영상도 좀 보게 되었는데, 어찌나 마음이 편하고 재미있는지 타 종교인으로서 이렇게 장점만 골라서 취해도 되는 건지 양심에 찔렸다.
일단 부처님은 용서해 주시겠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말이 '무연대비'다.


53 '무연대비無緣大悲'라는 말이 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베푸는 자비'를 뜻한다. 내 부모나 자식이기 때문에, 같은 종교를 믿기 때문에 베푸는 자비가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 그냥 베푸는 자비다.


무연대비야 말로 진정한 종교의 자세가 아닌가.
알다시피 종교전쟁으로 역사는 피 흘렸고, 같은 종교 안에서의 분파싸움도 여전히 거세다. 그 원인이 종교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한편으로는 그런 가르침을 다 지키고 살면 그게 부처고 교황이지 싶은 게 우리는 중생이자 어린양이라 별수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중요한 교리를 그중에서도 핵심만 정리하려고 했는데도 워낙 용어 설명이 많아 내용이 방대해졌다.
사실상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유식사상의 '3업'과 '8식', '아뢰야식 연기설' 같이 이론 중심의 중요내용은 다 생략해 버렸음에도 말이다.
불교의 교리는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다들 화가 가득하고 되갚아주지 못해 안달인 이 시대에 내 속에 화를 없애면 화를 참지 않아도 된다.
업보를 쌓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지옥이니 굳이 그걸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